수원설화

효자 최루백

작성자 : 수원문화원 날짜 : 20/12/08 16:17 조회 : 1718

화성의 숨결을 찾아서..

효자 최루백

김용국

최루백은 고려시대 효자로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조선 세종 14년(1432) 왕의 명을 받아 충신·효자·열녀를 뽑아 그 덕행을 찬양하는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란 책을 편찬·발간할 때, 그의 행적이 수록되었다는 사실로서도 그의 효행에 대하여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본관은 수원으로 戶長을 지낸 수원 최씨 始祖 최상저의 아들이다. 그의 나이 겨우 15세 때의 일이다. 그의 아버지 상저는 호장이라는 향리의 으뜸 구실을 하는 직책에 있으면서 틈 있을 때마다 사냥을 다녔다. 그는 본래 성품이 어질며 재주가 있어 누구보다도 활쏘기를 좋아했을 뿐 아니라 근처 산에 돌아다니면서 활솜씨를 발휘하여 짐승을 자주 잡아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최상저는 평시와 같이 활을 메고 산에 올라갔다. 마을 어귀를 벗어나서 산으로 접어들어 이리저리 올라가고 있을 즈음이었다. 이때 활을 쏠 준비조차 안하고 태연하게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엄습을 해 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엉겁결에 몸을 피하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으며 급기야는 호환을 당하고 말았다.

근처에서 나무를 하던 동네사람들이 있었지만 이 광경을 보고는 겁에 질려 떨고만 있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산중턱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는 그제서야 사람들은 집 근처로 뛰어가면서 소리를 질렀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고 아우성이 났다. 모두 연장을 들고 호랑이를 찾아가서 대항을 해서라도 죽은 육신이나마 찾아와야 하느니, 또는 호랑이에게 또 다른 변을 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 어찌 대항을 하겠느냐고 하는 사이 시간이 흘렀다.

이때 최루백은 집안에서 이러한 흉사가 있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글방에서 돌아와 보니 뜻밖에도 아버지가 호환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앞이 캄캄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루백은 정신을 가다듬고서는 산에 가서 아버지를 해친 호랑이에게 원수를 갚겠노라고 했다. 그의 어머니나 동네사람들은 도저히 안될 말이라고 말했으나 최루백은 말하기를 “하늘과 같은 나의 아버지가 범에게 해를 당했는데 자식된 도리로서 그 호랑이에게 어찌 원수를 갚지 않으리오.” 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말했다. “네가 부모를 생각하는 효심에서 우러난 마음이라는 것은 가히 짐작할 만하다 만은 네 나이 이제 겨우 15세로 그 용맹하고 포악한 짐승과 대결한다는 것은 당치 않은 일이니라.” 하고 만류를 했으니 최루백은 도끼를 들고 단신으로 호랑이의 간 곳을 추적하여 산으로 올라갔다. 그는 이곳 저곳 정신없이 헤매다가 호랑이를 발견했다.

그러나 호랑이는 이미 자기 아버지를 형체도 없이 다 먹고 배가 불러 누워있는 것이었다. 최루백은 기가 막혀 호랑이 앞에 다가서면서 꾸짖었다. “하늘과 같이 받들고 있는 나의 아버지를 네가 무참하게도 해쳤으니 나는 너를 마땅히 잡아 먹어야겠다.” 하고 호령을 하니 호랑이는 그 자리에서 이내 꼬리를 흔들고 사죄라도 하는 듯이 엎드리는 것이었다.

그 순간 최루백은 들고 간 도끼를 높이 들어 호랑이의 머리를 힘껏 내려찍으니, 호랑이는 단번에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그리고는 호랑이의 배를 갈라서 자기 아버지의 유골과 살을 꺼내 정결한 그릇에 담고 홍법산(弘法山) 서쪽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 산소 옆에 초막을 짓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삼 년 간 시묘살이를 했다.

최루백이 시묘살이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 잠시 졸음이 와서 잠이 들었는데 그 아버지의 혼령이 나타나더니 시를 읊어 말하기를 "가시덤불 숲을 헤치고 효자의 여막에 이르니 정이 많아 느끼는 눈물이 다함이 없구나. 흙을 져서 날마다 무덤에 보태니 마음을 알 자는 밝은 달과 맑은 바람뿐이다. 살아서 잘 봉양하고 죽어서 지키니 그 누가 효에 처음과 마침이 없다 하랴." 하였다.

후에 세종 14년(1432)에 세종대왕은 최루백의 효행을 기리는 글을 내렸으며, 또한 조선조 숙종 때는 선생의 효자비를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효자비는 원래는 봉담면 수기리 '효자문골'에 위치했었으나, 현재는 분천리에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