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설화
화서동 미륵불
화성의 숨결을 찾아서..
화서동 미륵불
김용국
1899년 간행한 [수원군읍지]에 기록된 '서둔동촌(西屯東村)', '고양동(高陽洞)', '화산동(花山洞)' 등의 마을이 오늘의 화서동(華西洞)이다. 그런데 '화서'란 본래부터 마을의 이름으로 전하여 오던 것은 아니다.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1936년 조선총독부령에 의해 '화서정(華西町)'으로 개편된 일본식 행정구역 명칭에서이다.
그러나 '화서'가 적어도 '화성(華城)'의 서쪽 마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일본은 화성의 본 이름을 두고 '수원성'이라 불렀다. 그런 그들이 화성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화서'라 불렀을 가능성은 그만큼 적은 이유에서다.
그러나 '화(花)'와 '화(華)'가 의미의 차이가 없는 글자임을 감안할 때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둔다.
1899년의 기록에 보이는 ‘화산동’이 그 근거다. 그렇게 두고 생각하면 또 하나의 숙제가 부과된다. 과연 '화산(花山)'은 어느 곳을 말하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화산'이 융릉이 자리한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의 화산(花山)만의 이름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도 '화산'이란 이름이 쓰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다면 말이다.
아무튼 화서동의 미륵불·약사 부처·마애불이라 불리는 석상에 전하는 이야기가 있어 소개하기로 한다. 사람에 따라 약사 부처라고도 하고 미륵불·마애불이라고 하나, 실제형상으로 보면 이들 명칭 가운데 어느 것도 적절한 것은 아니다. 다만 미륵이라 한다면 틀린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미륵이란 섬기는 이들의 믿음과 관계가 있지 정해진 형상이 있는 것은 아닌 까닭이다.
복골(지금의 우람아파트)에 바람이 거세게 불던 어느 날이었다. 산정에 있던 바위가 어찌된 까닭인지 산밑으로 굴러와 떨어져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어 어찌된 까닭인가 쑤군거리기 시작했다. “참 별일이네, 저 큰 바위가 어떻게 예까지 왔을꼬?” “글쎄 말이야, 어제도 산꼭대기에서 봤는데...” “산신령이 노했나 보네.” 이러저러한 말들을 주고받던 이들이 산신제를 지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한 사람이 계속하여 바위를 살피더니, “자, 여기를 보시오. 마치 부처님의 형상이 있는 것 같지 않소.” “어디어디.” 모여든 사람들은 앞다투어 바위의 전면을 살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정말로 가만히 살펴보니 꼭, 부처의 형상을 한 듯하지 않은가? 마을 사람들은 다시 회의를 했다. 처음으로 부처의 형상을 발견한 이가 제안을 했다. “우리 이 바위에 부처님을 새겨서 모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모두들 그렇게 하자하여 부처의 상을 조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조성된 부처님을 마을 사람들은 각자 정성을 다하여 모시기 시작했다. 그런 까닭인지 사람들이 기원하는 모든 일들이 신기하게도 성취되는 것이었다. 또 다른 이야기도 전한다.
일정 때였다. 평소 마을 사람들이 지극한 정성으로 부처님을 섬기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한 사람이 “에이 이깟 돌덩이가 무어라고. 제가 무슨 영험이 있어.” 하면서 불상을 도끼로 찍었다. 그런 뒤 그 사람은 부처님의 노여움을 샀는지 곧 죽고 말았다.
부처님의 영험함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고양골로 옮겨진 부처님을 싸리나무를 얽어서 부처집을 짓고 모시던 시절이었다. 개발로 인해 부처집 주위의 나무를 베어야 했다. 나무를 베기로 한 전날 밤 꿈에 하얀 도포를 입은 신령님이 나타나 이런이런 나무를 베지말라고 했다. 과연 다음날 나가보니 나무에 표시가 되어있었다고 한다.
전하는 이야기가 많다는 것은 그 만큼 마을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는 말이 된다. 결국 이 지역의 사람들은 이러한 유의 이야기를 통하여 한 마을에 사는 생활공동체로서의 동질감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