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설화

팔부자거리

작성자 : 수원문화원 날짜 : 20/12/08 16:07 조회 : 1461

화성의 숨결을 찾아서..

팔부자(八富者) 거리

김용국

미란 결코 아름다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말할 뿐 아니라 아름다움을 대하는 태도나 의식에 대하여도 생각한다. 이른 바 미의식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수원의 아름다움은 산천과 화성이 빚어낸 아름다움이며, 이러한 아름다움은 자연의 멋을 최대한 살려내고 인공을 가하되 자연의 이치를 거슬리지 않으려는 노력에서 연유된 아름다움임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수원의 팔경과 가을의 여덟 가지의 아름다움을 살폈다. 봄의 아름다움에 대하여는 돌아오는 해의 삼춘 화시절(三春花時節)에 다시 소개하기로 한다. 이제부터는 각 지역의 지명유래에 대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정조께서 수원의 읍치를 화산에서 옮기면서 백성들을 새로운 읍치에 이주시키는 것만을 생각하신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도시가 백성들만을 이주시킨다고 자생력이 있는 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기에 정조께서는 백성들이 자생력을 갖추고 새로운 도시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경제적 여건의 마련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하셨다.

그러한 까닭에 정조께서는 어떻게 하면 새롭게 정착하는 백성들이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생활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팔부자 거리를 조성하셨다. 팔부자 거리는 바로, 정조의 백성사랑이 얼마나 세심하며, 따뜻하였나를 보여주는 좋은 보기가 된다.

팔부자 거리는 정조께서는 읍치를 옮기시면서 수원의 경제적 발전을 위해 서울을 비롯한 팔도의 부자들과 상인들에게 이주와 정착에 필요한 경비와 정착자금을 대여함으로써 형성된 거리이다. 이렇게 큰 부자들이 이주를 해 옴으로써 수원의 경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하여 수원의 백성들은 경제적인 면에서 많은 혜택을 보게된다.

이에 은혜를 입은 백성들이 이 거리를 일명 보시동(普施洞)이라 이름하게 되었을 것이다. 팔부자 거리는 장안동 네거리에서 수원천 방향으로의 뒷길로 소화 초등학교와 북수동 성당, 청과 시장을 거쳐 후생병원에 이르는 길을 말하며, 이 곳에 있는 북수동성당에서 발행한 ‘북수동성당 70년사’에 주임신부가 서울교구장에게 보낸 편지에 팔부자거리의 유래가 있어 소개한다.

주교님, 아마도 팔부자집의 전설을 아는 것은 주교님을 기쁘게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제게 말했던 것처럼 정조 임금은 그의 조상에 대한 효성이 대단했고 자주 밤에 그들의 무덤을 방문했고, 이렇게 함으로써 특히 사도세자의 기억을 명예롭게 하기를 기원했습니다. 사도세자는 군림하는 왕에게 주는 훌륭한 충고들의 중요성을 위해 쇠로 된, 뾰족한 끝이 삐죽삐죽 늘어선 상자 속에서 죽었습니다. 너무나도 슬픈 종말은 정조왕의 마음에 슬픈 감동을 주었고 무덤에서 좀더 가까이에 있기 위하여, 그리고 더 자주 방문하기 위해 수원에 하나의 거주지를 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도지사가 거처하고 있는 이 마을에 궁전을 하나 세우게 했습니다. 그의 명령에 따라 왕국의, 그리고 가장 부유한 8지방을 대표하는 8명은 같은 계획과 같은 방향으로 8개의 집을 지었습니다. 거기서부터 ‘팔부자집’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제가 산 집은 가장 아름답고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잘 보존되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팔부자거리는 정조의 백성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근거의 하나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