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설화

팔달산

작성자 : 수원문화원 날짜 : 20/12/08 16:04 조회 : 1857

화성의 숨결을 찾아서

팔달산(八達山)

김용국

수원의 도시 중앙에 팔달산이 자리하고 있다. 시민들 중에는 팔달산 때문에 수원의 교통체증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선거철이면 팔달산에 터널을 뚫겠다는 공약이 나오곤 한다. 물론 그렇게 해서 교통난이 어쩌면 해결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활한 교통흐름만이 삶의 질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행히도 수원 시민들은 당장의 편익을 제공하는 그러한 공약에 현혹되지 않았다. 위대한 수원시민의 승리로 지켜낸 팔달산. 왜 팔달산이라고 불리워지게 되었는가를 알 수 있는 이야기가 있어 소개하기로 한다.

고려왕조가 몰락하였다고 어찌 새로 들어선 이태조를 섬길 수 있느냐며 고려의 절개있는 신하들은 조선왕조의 협조 요구를 거부하고 그 길로 송악산 깊숙한 곳, 만수산으로 들어가서 초막을 짓고 마을을 이루어, 갖은 고생을 하며 세상에 나오지를 않았다. 이들은 조선왕조의 끈질긴 협조요구에도 끝내 응하지 않았다.

이에 이태조는 만수산에 불을 질러 위협했으나, 끝내 이곳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불에 타서 죽었다는 두문동칠십이현의 이야기를 사기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그때의 일이었다. 여말에 여주인 학사 이고가 있었다. 호는 망천으로, 공민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로부터 대사성집현전제학이 되었는데, 공양왕때에 와서 정란으로 나라가 장차 쇠망해감을 예견하고, 자진 은퇴하여 수원의 광교산 남쪽에 있는 탑산 밑에 살고 있었다.

이고는 팔학사의 한 명으로, 이때 조견, 이집 등과 왕래하며 광교산 아래 개울물에 발을 담그고,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는 등 여러 학사들을 벗삼아 세상을 잊고 소요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 개울을 후세 사람들은 망천이라 일러왔다고 한다. 이분이 사시던 뒷산을 탑산이라 했다. 올라가 보면 어느 산과도 연결되지 않은 독립되어 있는 산으로 보이며, 평지에 탑을 세워 놓은 듯, 딴 산과는 뚝 떨어져 있다 하여 탑산으로 불리워 왔는지 모른다.

당시 공양왕은 사자를 보내어 무엇으로 소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이 고는 “집 뒤에 조그마한 산이 하나 있사온데, 들 가운데 있는 산으로서, 산에 올라가서 사방을 살펴보면 어디고 막히는 데가 없어 사통팔달 하여 내다보는 시야가 탁 트이고, 또한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산이옵니다. 그러므로 이곳에 살고 있는 것이 가장 즐거움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후 이태조가 등극한지 2년이 지나서 신조에 나와 경기우도 안염사의 벼슬을 하라고 여러 차례 권고하여 불렀으나, 끝내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태조는 할 수 없이 화공(畵工)을 시켜, 얼마나 그 산이 좋은지 그림으로 그려 오라고 명하였다.

화공이 그려서 바친 탑산의 그림을 본 이태조는 ‘역시 아름답고 좋은 산이구나’하시며 크게 칭찬한 다음, 그렇다면 그 산을 팔달산이라 이름지으라고 한 뒤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팔달산이라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