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설화

칠보산 용화사

작성자 : 수원문화원 날짜 : 20/12/08 15:53 조회 : 1653

화성의 숨결을 찾아서....

칠보산 龍華寺 彌勒佛

김용국

미륵불에 대한 설화는 우리 고장 수원에서도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가 있다. 앞서 소개한 파장동의 미륵이나 화서동의 미륵설화가 그 예가 된다. 그 중에서도 칠보산에 있는 용화사의 미륵불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왜냐하면 유독 용화사의 미륵에 전하는 이야기가 그 어느 마을의 미륵설화보다도 다양한 형태로 전하는 까닭이다.

설화의 발생이 민중의 삶과 의식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발생하고 전한다는 점에서 용화사의 미륵은 수원지역 민중들의 정신세계를 드러낼 수 있는 좋은 증거라고 생각하기에 더욱 그러하다. 여기에 칠보산 용화사에 전하는 설화를 소개하는 까닭이 있는 것이다.

선몽으로 나타난 미륵불은 안양의 용화사 미륵불의 설화에서도 나타난다. 이렇게 선몽하여 모셔지는 미륵불은 민중의 어려움을 듣고 해결해주는 기복적인 일면과 선을 권하고 악을 징벌하는 기능으로써의 역할을 하게된다. 미륵불의 조성 시기는 정확히 전하는 바는 없다. 조선 중엽이거나 말엽쯤으로 추정될 뿐이다.

여느 마을과 다름없는 자그마한 마을. 사람들은 나무를 하거나 연자방아나 돌절구 멧돌을 만들 돌을 얻기 위해 산을 오르내리며 미륵골에 서있는 미륵을 향해 합장을 하는 정도의 경의를 표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미륵의 받침돌에 작은 돌을 문지르면 잘못이 있는 사람은 그 돌이 거기에 들러붙고 죄가 없으면 돌이 붙지 않는다고 믿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김실개라는 여자가 나타난다. 그의 꿈에 이곳에 가면 미륵불이 계시니 치성을 다하라는 선몽이 있어 이곳을 와보니 정말로 미륵불이 있었다 한다.

김실개는 미륵불 앞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치성을 다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우장을 쓰고서라도 치성을 드렸다. 대수롭지 않게 미륵을 대하던 마을 사람들은 실개의 지극정성에 미륵의 영험함을 새삼 느끼게 되었고 이에 허름하게나마 움막을 지어줌으로써 그녀로 하여금 치성을 다하게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죽고나자 마을의 유지들이 합심하여 절을 짓게된다. 그러면서 미륵불을 보다 잘 모실 요량으로 미륵에 칠을 하게되는데 미륵의 눈에 칠을 하던 이는 그 자리에서 눈이 멀었다 한다. 그리하여 두려움을 느낀 마을 사람들은 미륵의 칠을 벗기고 지금 전하는 바와 같은 미륵의 모습을 유지하게 되었다 한다.

이 설화는 미륵불의 영험함을 입증하며 이 미륵불이 누군가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조성되었으며 예언적 당래불로서의 위상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용화사의 미륵불은 비교적 근래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한다.

이는 현재 생존하고 계시는 한상훈옹의 체험담이기에 설화가 민중의 삶과 밀착되어 있음을 입증하는 좋은 예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한상훈옹의 제보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한다.

약 70년 전 용화사에서 한문을 수학하던 제보자(한상훈:80세)에 의하면 용화사 미륵당 뒷뜰에서 돌부처를 캤다고 한다. 함께 공부하던 이도 돌부처를 캤으며, 그 날밤 당시 제보자에게 한문을 가르치던 주지스님의 꿈에 또 하나의 돌부처가 있다는 선몽이 있어 다음날 그 자리를 캐어보니 정말로 돌부처가 나왔다. 그리하여 세 개의 돌부처를 캐내었다 한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돌부처의 밑에 구멍이 있어 보니 돌부처의 내력과 어느 날 이 돌부처가 발견될 것이라는 쪽지가 나왔다고 한다. 당시 발굴된 돌부처는 용화사 너머 어느 암자로 옮겨졌다 하는데 그 암자가 어디인 지는 알 길이 없다.

또한 칠보산 용화사 아래 마을에는 밀양박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데 그 집안 사람들의 기억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이 마을은 대대로 장사(壯士)가 많이 나는 곳이었다 한다. 칠보산(七寶山)에 돌이 많아 이 마을 사람들은 집집마다 멧돌과 돌절구, 연자방아가 있었다 한다. 빙판(氷板) 위에서 나막신을 신고 커다란 연자방앗돌을 새끼로 묶어서 이빨로 끌 정도의 장사가 있었다고 하며, 심지어는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친 장사가 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찌된 까닭인지 노방(路傍)의 미륵불을 당(堂)을 지어 모시면서부터는 더 이상 장사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마을의 토박이인 밀양박씨들은 절을 지으면서 땅의 기운을 막았고 그러면서 칠보산의 정기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라고들 믿고 있었다.

일본이 칠보산의 혈(穴)을 막기 위해 박았다는 쇠말뚝이 이를 입증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칠보산 용화사에 이와 같이 많은 설화의 각 편이 전승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만큼 용화사의 미륵은 우리 고장 수원 사람들의 세상살이에 있어 많은 영향을 수수(授受)하며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