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설화
최서방네 군웅
화성의 숨결을 찾아서..
최서방네 군웅
김용국
당제는 마을의 결속을 다지고 풍년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던 부락단위의 제의(祭儀)로 농경문화에서는 매우 중시되던 마을공동체의 행사였다. 그러니 만큼 제의의 준비나 절차는 매우 엄격하고도 신성하였던 것이다.
당제를 위하여 마을사람들 모두가 정성을 다해 삼가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미신으로 타파의 대상이 되었으며, 아니러니하게도 새마을 운동에 의해서도 마을의 당제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한 탄압과 역사적 질곡 속에서도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당제가 우리민족의 삶과 얼마나 밀착된 것이며, 계승되고 복원되어야 할 문화유산인가 하는 것을 반증한다.
기왕 칠보산과 그 자락에 전하는 이야기들을 살피는 김에 호매실동의 당제(堂祭)를 소개하기로 한다. 호매실동에는 최서방네 군웅이라 불리는 당이 있다. 이 마을은 수원최씨들에 의해 이루어진 마을로 당제를 준비하고 행하는 주체가 수원최씨 집안이라 한다. 그간 당제(堂祭)를 준비하고 주관하였다는 최인혁씨에 의하면 일년에 두 차례에 걸쳐 각각 칠월에는 당제, 시월 상달에는 마을제사를 지냈다 한다.
축문도 본래는 있었으나 최인혁씨가 풍이 오면서 제의를 주관할 수 없게 되자 지금은 축문 없이 당제를 지내고 있다. 다음은 수원시사에 기록된 최서방네 군웅에 대한 내용이다. 제당의 이름은 ‘군웅당’이라 불리며 신격은 군웅할아버지, 군웅할머니로 칭하며 이를 산신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
당 내부에는 한지를 접어 천장을 가로질러 매달아둔 줄에 걸어두고 군웅할아버지. 할머니로 보고 있다. 그리고 종이상자 속에 두 분의 옷이 들어있는데, 제사 때 꺼내 걸어두며 매년 봄이 되면 옷을 살펴 낡았을 때는 새 것을 마련한다. 상시적으로 당을 맡아 보살피는 당주가 있어서, 매달 초하루에 올라가 북어, 정화수 등 간단히 제물을 차려놓고 제를 올리고 있다.
마을제사는 음력 10월에 동네회의에서 날을 잡아 제관을 뽑는다. 50여 호가 모여 먼저 어디(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무당-단골-에게)가서 날을 물어보고 오면 제사 20여 일 전쯤에 회의를 연다. 대동회에 쌀.돈 등을 자기 성의대로 가지고 가서 제의 경비로 마련한다. 제사 때 당에 금줄을 치며 깨끗하지 않은 사람은 벌을 받을까봐 스스로 참석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이들을 제외하고 마을사람 모두가 참석한다.
제물은 보통 제사 때처럼 술. 적. 배. 사과 등과 함께 소머리, 시루떡 6말. 북어 5-6마리로 마련하다. 아침에 제사를 지낸 후 모두 함께 음복하면서 두레 치며 춤추고 놀다가 저녁쯤 내려온다. 동네사람들은 이날 하루를 동네잔치로 즐기고 있다.
한편 이렇게 많은 제물을 준비하는 이유는 이렇다. 제보자 최인혁씨에 의하면 예전에는 이 마을에 우물이 많았다 한다. 군웅당에서 제를 올린 뒤, 각 우물마다 제물을 놓고 간단하게 우물고사를 지내느라고 그만큼의 제물이 필요했다고 한다.
제보자의 15대조부터 이 마을에 정착을 했다고 하니 이 마을의 역사는 4-500년에 이른다. 정확한 유래는 알 수가 없으나 당의 명칭이 최서방네 군웅(당)이라 불리고 있음에서 알 수 있듯 이곳은 수원최씨 집성촌으로 수원최씨에 의해서 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군웅당은 본래 군웅이라고만 불리던 것이 당을 지으면서 군웅당이라 불린다고 한다. 군웅당제는 음력 7월 초하루, 소를 잡아 소머리를 제수로 썼다고 하며, 마을에서는 10월 상달에도 가을고사의 형식인 마을 고사를 올렸다. 이 날은 금곡리의 부부단골을 불러 고사를 드렸으며 마을 주민이 모두 참석을 했다.
행사의 규모로 보면 7월의 군웅당제 보다도 10월의 마을 고사가 컸다고 한다. 또한 군웅당의 영험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하기도 한다.
옛날에 이 곳에 거주하던 수원최씨 중에 과거를 보러 가는 사람이 있었다. 무심히 한양을 향하여 길을 갈 때였다. 그런데 말발굽이 붙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 말에서 내려 군웅당에 고하고 예를 올리자 말을 타고 갈 수가 있었다. 이렇게 하여 과거를 치룬 최선비는 과거에 붙었다. 어떤이는 그 선비가 암행어사였다고도 한다. 그런 뒤로 최서방네는 어디를 향해 길을 나서든 군웅당에 제사를 지내고 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