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설화
조원동 우성위
화성의 숨결을 찾아서....
조원동의 富者 우성위
김용국
조원(棗園)동의 모태가 되는 지역은 대추나무가 많다고 하여 대추원, 조원말, 또는 조원, 주원말, 주안골, 주원, 주안말 등으로 불린다. 한편 조원동의 유래를 다른 데에서 찾는 이도 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조선 시대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증직(贈職) 받은 이동일(李東一)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의 호가 조포(棗葡)였으며, 이에 후손들이 그의 호를 따서 동네 이름을 조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어찌 되었든 '조원'이란 대추나무 고을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많은 설화가 전하는데 그중 남에게는 인색하여 물 한 모금도 줄줄 모르고 재물에 대한 욕심은 한이 없는 한 부자가 스스로 제 발등을 찍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우성위의 이야기는 두 가지의 유형이 있다.
첫째, 확실하지는 않지만 백제 어느 임금의 부마인 우성위라는 사람이 조원동에 살고 있었다. 마을 전체가 우성위의 땅이었을 만큼 그는 큰 부자였다. 그러나 그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위인이었다. 흉년이 들자 너나 없이 양식이 부족하였다. 그러니 수행을 하는 스님들도 양식걱정에 예외일 수는 없었다.
어느 날 한 시주승이 우성위의 집을 찾았다. 시주승이 시주를 부탁하였지만 거절을 당했다. 시주는 그만 두고라도 너무나 목이 말랐던 시주승은 물이라도 얻어 마시려 했지만, 물이 귀하다며 이도 거절당하고 말았다. 문밖으로 쫓겨나면서 시주승은 “집 뒤에 있는 산을 뚫어 수로를 내면 물이 풍족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곤 사라졌다.
물이 풍족할 것이라는 스님의 말에 우성위는 귀가 솔깃했다. 이에 그렇게도 인색한 위인은 막대한 돈을 들여 광교산의 물줄기를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물고를 내기는 쉽지 않았지만 스님의 말만을 믿고 오랜 기간에 걸쳐 공사를 계속했다. 그러나 끝내 물고를 내지 못하고 그 많은 재산을 탕진한 채 망하고 말았다 한다.
둘째, 조원동 갓모봉 아래 백제왕의 사위였다고 하는 우성위라는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 일대의 논밭이 모두 그의 것이었을 만큼 부자였다. 그래 마을 사람들은 주위의 들을 우성위들이라 부를 정도였다. 어느 해인가 큰 가뭄이 들어 논은 갈라지고 밭의 곡식들은 말라가고 있었다. 모두가 물이 모자라 끌탕을 하고 있는 차에 한 스님이 우성위의 집을 찾아 시주를 부탁했다. 가뜩이나 가뭄으로 걱정이 많은 우성위에게 스님의 시주 요구는 그의 화를 돋굴 뿐이었다. “이 흉년에 무슨 시주를 하라는 거요?”하고 거절을 했다.
스님은 “그렇다면 물이라도 좀 주셔서 갈증이라도 풀게 해주시오” 그러나 우성위는 매몰차게 거절했다. 우성위의 인색함을 안 스님은 짐짓 고개를 끄덕이곤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저기 보이는 마장산 너머 광교천에서 흐르는 물줄기를 끌어오면 가뭄이 해결될텐데...” 우성위는 스님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물었다. “그야 어렵지 않습니다. 마장산 줄기가 내려간 가운데 쯤을 파서 수로를 내들어 가면 물은 자연히 흘러내려 올 것입니다.”이 말을 마친 스님은 훌쩍 떠나가 버렸다. 우성위는 스님이 일러준 대로 수로를 파기 시작했다. 그러나 워낙 큰 공사인지라 공사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우성위의 가세는 날로 기울어갔고 급기야 완전히 망하고 말았다.
실은 우성위들이 광교천보다 더 높은 지형이라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불가능한 공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스님이 수로를 파라고 일어준 자리는 마장산 줄기의 중간 부분으로 풍수지리상 거문고의 혈(穴)이었다. 그러니 거문고의 음률은 울리는 혈을 끊은 결과가 되고 만 것이다.
거문고의 생명이라 할 혈을 끊었으니 스스로 자기의 무덤을 판 셈이다. 우성위가 팠다는 수로의 흔적이 30여 년전만 해도 영화동에서 조원동으로 넘어가는 작은 기가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우성위의 전설은 이렇듯 오늘에 이어져 인정 없이 제 것만을 챙기고 치부하려는 현대인에게 경종을 울리고 참된 삶의 의미를 되짚어 보게 하는 본보기가 되어 전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