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설화
여기산과 항미정
화성의 숨결을 찾아서
여기산과 항미정
김용국
해질 무렵, 여기산의 그림자가 축만제[西湖]의 수면에 비치는 풍경의 아름다움을 수원팔경 중 하나인 서호낙조(西湖落照)라 한다. 서호에 비친 여기산의 모습은 마치 미인의 눈썹을 연상케 했다고 한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항미정에서 감상했던 듯하다. 항미정은 수원의 눈썹으로 상징되며 주변 노송들과 함께 서호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항미정(杭眉亭)은 권선구 서둔동 농촌진흥청 내에 있는 정자를 말한다. 정자의 이름을 항미정이라 한 것은 중국의 소동파라는 시인이 소주(蘇州)에 있는 서호(西湖)의 아름다움을 항주의 미목(眉目)이라 한데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항미정은 조선 제23대 순조 31년(1831) 당시의 화성유수 박기수(朴綺壽)가 축만제의 풍치를 더욱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장안문 밖의 폐사를 뜯어다가 지은 것이라 한다. 박기수가 지은 것이라면 그의 재임한 기간이 신묘년 2월에서 임진년 정월사이에 지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겨울철에 지은 것이 아니라면 1831년에 지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로 보면 항미정은 170년 전에 지어진 것이 된다.
항미정에서 서호를 바라다보면 북서쪽으로 여기산이 있다. 여기산은 ‘화성성역의궤’에는 여기산(如岐山)으로 기록되어 있고, 1997년 ‘수원시 행정 구역도’에는 여기산(麗妓山)으로 나와 있다. 산의 모습이 기생의 자태와 같이 아름답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산이 아름답다고 하여 꼭 기생에 비유를 하였다는 것은 납득되지 않는다.
기(妓)자가 와전된 것은 아닐까? 아니 차라리 와전된 것이었으면 좋겠다. 하필 왜 기생인가 말이다. 어찌 되었든 ‘발가벗고 삼십리’ 설화에서 만난 수원양반이 들렀다는 술집이 서호의 근처이고 기생과 어울렸다는 이야기를 근거로 한다면 그리 개연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술에 취해 여기산의 아름다움을 기생의 요염한 자태에 비유했을 가능성은 남아있다.
그런데 여기산의 아름다움은 비단 겉으로 그러나는 것 뿐만은 아니다. 여기산이 청동기와 철기시대에 걸친 거주지였다는 사실은 수원의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산성을 쌓을 정도로 거주에 적합한 환경이었다는 것은 사람들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었음을 의미하는 까닭에서이다.
그 시대에도 여기산은 우리 조상들의 거주지로서 제 몫을 톡톡히 하였다니, 더욱 아름답고 귀하게만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산에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은 이미 숭실대학교 박물관에서 1979년부터 1984년까지 4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당시 발굴조사를 통해 청동기 시대 및 초기 철기 시대의 토기. 철촉, 방추차, 온돌 구조 및 집자리가 발견되었으며 이는 청동기 시대 중기부터 초기 철기 시대까지 중부 지방의 대표적인 생활 유적지로 확인된 바 있다.
오늘날 서호낙조의 풍경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것이 있다. 잘 정비된 공원도 공원이지만 여기산에 날아드는 수많은 백로는 여기산의 아름다움뿐만이 아니라 서호의 아 름다움도 한층 더하고 있다. 게다가 철새까지 날아드니 말이다. 하하, 그러고 보니 또 철새들이 날아들 철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