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설화
세류3동 산신당
화성의 숨결을 찾아서
세류3동의 산신당
김용국
마을 제당의 기능은 무엇보다 기복(祈福)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건강을 빌거나, 풍년을 기원하고, 천재지변(天災地變)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원의 내용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에서 말이다. 또한 마을의 제당은 지역의 주민들을 생활공동체로 묶어주었다. 섬기는 대상이 같고 기원의 내용이 일치했다는 점에서 마을의 제당을 중심으로 한, 주민들의 단결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마을이 운명공동체로서의 기능을 담당하였던 것도 마을에 주민이 공통적으로 섬기는 대상이 일치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몰론 동일한 성씨로 구성된 단일 씨족의 마을도 적지 않았었고, 자연의 힘을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했던 시대적 상황이 크게 작용하였음도 중요한 요인이지만 말이다. 보통 마을의 중심이나 어귀에 선 가장 오래되고 큰 나무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겼다. 그 옆에 당집을 짓는 것이 보편적인 제당의 구성이었다. 그러나 지역과 개개 마을의 여건상 신목(神木)이 없는 경우도, 당집이 없는 경우도 있다. 물론 본래 있던 것이 세월의 풍파로 사라져버린 경우도 있다.
이 번호에는 권선구 세류3동에 있는 산신당을 소개하고자 한다. 산신당은 80년대 사라졌던 것을 마을의 어른들이 다시 복원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 의미가 더 깊다. 본래 전해지던 것을 계승함보다 사라져버린 것을 복원한다는 것이 그만큼 어려움을 잘 아는 까닭에서이다.
1970년대에 조사하여 발간되었던 ‘한국의 마을 제당’경기도 편에 기록에 의하면, 당의 이름은 산신당(山神堂)으로 부락의 뒷 편에 있었다. 기와를 얹은 당의 규모는 두 평 정도로 내부엔 약간의 제기(祭器)와 돗자리가 있었다. 신목(神木)은 괴목(槐木)으로 높이는 약 10미터 둘레는 80센티 정도였다.
1998년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그 괴목은 참나무였다고 한다. 신격은 산신으로, 이 곳까지 호랑이가 나타났기에 산신을 위했다 한다. 제의 목적은 부락의 안위를 기원하는 것이었다. 제관은 부락회의를 거쳐 부정이 없는 세 명의 남자가 선출된다. 그러나 근래에 다시 당제를 지내면서는 여자도 제관으로 선출된다고 한다. 다만 출산전후나 달거리 중인 여자는 제외한다는 점이 남자에 비해 제약을 받는 점일 것이다.
제의 전에 목욕을 하여 몸을 깨끗이 함은 물론 술과 여자를 멀리했다. 제의는 음력 10월 1일 저녁으로 제수(祭需)는 소머리와 술, 떡과 과일 등이라고 한다. 지난주에 소개하였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날짜를 계산에 넣지 못한 필자의 어리석음과 게으름이 제 때에 산신당을 소개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였음을 죄송스럽게 생각하며 이해와 용서를 구한다.
아무튼 기왕에 산신당도 복원이 되었고 하니 이제는 장승도 세워 옛 전통을 오늘에 계승하였으면 한다. 태장면 고개에서 지금의 성원아파트자리 뒤쪽을 장승백이라 했다. 물론 장승이 세워져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장승이 세워진 의미하고는 다른 점이 있다. 보통은 마을의 입구임을 알리는 이정표의 기능과 액을 막는 기능이 장승의 기능임에 비해 이 곳의 장승은 지역의 경계의 표시하는 기능은 없었다고 하며, 오직 마을을 역병과 위험으로부터 보호되기를 바라는 기원의 의미에서 세워졌던 것이라 한다.
여하의 문화이건 사라지면 그 뿐이다. 과거에 어떤 의미와 기능을 하였어도 오늘에 계승되지 않는다면 그 의미는 상실된다. 산신당이 복원된 만큼 장승도 복원이 되어서 이 마을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이들이 문화적 자부심과 공동체 의식을 함께 갖게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