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설화

벼락감투 쓴 박서방

작성자 : 수원문화원 날짜 : 20/12/08 14:34 조회 : 1319

벼락감투 쓴 박서방

민심을 살피기 위해 임금이 암행(暗行)하였다는 기록은 적지 않다. 이는 이야기의 형식으로 구전되고 있으며, 주로 서울을 중심으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지역에 전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계획도시 수원을 건설한 정조(正祖)의 암행에 대한 이야기도 수원지역에 전하고 있다. 그러나 정조의 암행은 민심만을 살피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정조를 일러 효의 임금이라 부르는 것처럼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백성들의 생각이나,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기까지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이야기들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정조는 물론 백성들의 어려움을 듣고 또 이를 해결해 주었겠으나, 현재까지 조사되고 발굴된 이야기는 지지대 고개에서 융건릉을 오가는 지역에서 전하는 것으로 아버지이신 사도세자에 대한 백성들의 생각, 즉 정조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백성들에 대한 배려요 고마움의 표시인 것이다.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간촌 이생원의 벼락과거’가 그 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

이 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대황교를 지나 곡반정에 사는 박씨에게 벼슬을 내린 이야기다.

곡반정은 골반정이라도 불리며 수원의 동남부에 위치한 마을인 반정리의 서쪽에 있다.

곡반정의 유래를 보면 이렇다. 수원 유수가 지역을 순시하던 중, 이곳[半井]에 와서 물을 마셨다. 물맛이 매우 시원하여 반(半)에 물 수(水)자를 더하여 얼음 녹을 반(泮)으로, 정(井)자에도 물 수(水)를 더하여 얼음물 괼정으로 고쳐 반정이라 했다. 오늘날 곡반정으로 불리는 것은 온수곡의 곡을 더하고 이 곳이 쉬어갈 만한 곳이라하여 정을 정으로 고친 것이라 전한다.

이야기의 지명은 '반제'라고 하여 그 지역이 어딘지 분명치는 않으나 '골반제' 등으로도 불리는 것을 보아 '곡반정'이 와전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튼 이 곳에 살던 박씨에게 정조께서 고마움의 표시로 벼슬을 내렸다는 이야기의 사연은 다음과 같다.

정조께서 아버지의 산소에 다녀오시는 길에 반제라 불리는 곳을 지나시게 되었다. 아침에 출발하여 아버지의 산소를 돌아보고 돌아가시는 길이니 시장도 하셨다. 길을 가다보니 원두막이란 것도 어떤 곳인가 궁금하여 잠시 원두막에 들러 쉬시기로 하셨다. 그래 버드나무 가지에 말을 매고선 원두막에 오르셨다.

원두막 주인인 박씨가 보아하니 보통인물은 아닌 것 같고 하여 참외도 대접을 하고 집에서 밀개떡도 쪄서 대접을 했다. 정조께서 다 잡수시고 난 뒤에 “게 어디 사는 누구요?” 라고 물으셨다. 그래 원두막 주인 박씨가 “골반제에 사는 박서방입니다.” 하는 대답을 듣고, 잘 먹었다고 인사를 하곤 길을 떠나셨다.

그 뒤 그 고마움을 잊지 않으시고 벼슬을 내려 반제 박씨들이 벼락감투를 썼다고 한다. 그 간 소개한 바 있는 '민어로 집강벼슬', '간촌 이생원의 벼락과거'와 '벼락감투 쓴 박서방' 등의 설화에는 공통점이 있다. 어떤 이들은 정조의 인사에 원칙이 없고 순간적이고 감정적이었다는 생각을 갖게되기도 할 것이다.

인사(人事)도 사람의 일이니 감정에 이끌림이 전혀 없다고는 단언할 수 없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상식이 통하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정조께서 행했다고 하는 위의 이야기들은 정조의 인사정책에 문제를 제기하기보다는 하나의 에피소드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상식의 정도야 각자의 그릇에 따라 다른 것이니 누구의 잣대로 옳고 그름을 가리겠는가? 가시덤불 쑥구렁에 묻힌 옥돌을 누가 볼 줄 알고 가려 쓰겠는가? 누가 갈고 닦아 보석으로 만들어 내겠는가? 이 모두가 안목에 달린 것이다.

요즘 민선 3기의 지방자치단체가 인사를 행하면서 이러저러한 뒷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도 상식의 정도가 다름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릇의 크고 작음에서 연유된 것이다. 귀는 둘이고 입은 하나다. 이 것만이 그릇에 맞는 내용물을 담아 낼 유일한 방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