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설화

법화당 미륵불

작성자 : 수원문화원 날짜 : 20/12/08 14:23 조회 : 1320

화성의 숨결을 찾아서...

파장동의 법화당의 미륵불

김용국

지지대 고개에 있는 프랑스군 참전기념비에서 효행공원을 오른 편에 두고 파장동 버스종점을 향하여 내려오다 보면 괴목정교(槐木亭橋)라는 표석이 보인다. 괴목정교에는 의적(?)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괴목정교가 정조에 의하여 세워지기 전 이 곳에는 통행세를 받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통행세를 받은 사람은 세 사람으로 이들은 이틀 걸러 하루씩 한 냥의 통행세를 받았다. 그래 이 곳을 ‘한냥골’이라 불렀다 한다. 이들은 거두어들인 통행세를 자신들의 봉창을 채우는 날강도가 아니라 이렇게 하여 모은 돈으로 당시 파장동에 살고있던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고루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여하튼 이 표석을 지나 약 50에서 60미터 정도 내려오면 법화당이다. 법화당에는 미륵불이 모셔져 있다. 미륵은 갓의 모양에 따라 남자와 여자를 구분한다. 갓의 모양이 둥글면 남자, 갓의 모양이 네모지면 여자가 된다. 법화당의 미륵은 둥근 갓을 쓰고 있으니 남자 미륵인 것이다.

그러나 미륵은 어떤 정형화된 형상이 없다. 길가에 선 큰돌이나 문인석(실제로 화성시 양노리의 미륵은 문인석이다)조차도 미륵으로 섬기면 미륵부처가 되는 것이다. 이는 그만큼 미륵신안이 민중들의 삶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민간에서 이렇게 섬겨지는 미륵에 대한 기록은 고구려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황해도(黃海道) 곡산군(谷山郡) 화촌면(花村面) 봉산리(蓬山里)에서 출토된 소동상의 광배(光背)에 미륵신앙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미륵신앙은 인간만사 백인백색의 소원을 기원하는 대상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법화당의 미륵 역시 파장동의 주민뿐 아니라 인근동리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기원의 대상이 되어왔다. 지금 이곳을 관리하고 있는 파장동 버스종점의 구멍가게 아주머니에 의하면 한참 성(盛)할 때에는 하루에서 수 십 명씩 소원을 빌러 법화당을 찾았다 한다.

법화당의 미륵불에 얽힌 이야기가 전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조선군의 행방을 쫓던 일본군은 법화당에 이르러 미륵에게 조선군의 행방을 알려달라고 하자, 미륵은 조선군이 서울네미(프랑스군 참전비 뒤쪽, 광교산을 넘어 과천과 서울방향으로 다니던 길)쪽으로 갔다고 가르쳐 주었다. 이에 쫓기게 된 조선군은 후일 다시 이곳에 돌아와 미륵의 목을 절단하였다한다.

전설이란 사실을 토대로 하는 것은 아니며 그 증거물을 토대로 하여 지어진다고 볼 때, 이는 당시 미륵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들을 언제나 보호하여 줄 것으로만 여기며 섬기다가 막상 일본군의 피해를 입고 나니 그 원망의 화살이 이 지역의 수호신인 미륵에게로 향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는 갈미(葛山-현 의왕시 내손동으로, 칡이 많은 산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갈미란 이름이 붙여진 이곳은, 조선 22대 정조 이전만 해도 서울에서 과천을 거쳐 수원을 가자면 반드시 이 마을을 거쳐야 할 만큼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 이들의 숙식을 제공하는 원(院)과 주막(酒幕)이 있었을 만큼 큰 마을이었다.)의 여자 미륵전설과 비교하여 보면 그 가능성은 더 커진다.

조선군의 행방을 몰라하던 왜군들은 먼저 갈미에 있는 미륵에게 조선군이 어디로 갔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러나 좀체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왜군은 조선군의 뒤를 쫓아 뱃골(지금의 파장동과 이목동)까지 오게되었다. 그런데 볍화당의 미륵불은 조선군이 간 곳을 알려주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된 조선의 군사들은 화가나서 법화당 미륵의 목을 부러뜨렸고 갈미의 미륵은 그냥 둔 것이라 한다.

같은 전란을 겪으면서 갈미의 미륵은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산 하나 너머에 있는 법화당의 남자 미륵이 피해를 입었다는 것은 양 지역의 수호신에 대한 모종의 힘겨루기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도 배제 할 수만은 없다.

그렇게 하여 목이 잘린 채 방치된 파장동의 미륵불은 6.25를 겪고 나서야 한 독지가에 의해 1959년 지금의 법화당에 모셔질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미륵불은 마을 사람들이 다시 맞추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몸의 일부는 땅속에 묻혀있는 상태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