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을 품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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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설화
민어로 집강벼슬
2002. 4.1 화성의 숨결을 찾아서..
민어로 집강 벼슬
김용국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陵)을 융릉(隆陵)이라 한다. 융릉은 현재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산 1-1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둘째아들로 영빈이씨의 소생이며 창경궁 집복헌(集福軒)에서 태어났다. 불행하게도 28세의 나이로 뒤주 속에 갇힌 채 굶어죽고 말았다. 사도(思悼)란 아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을 후회한 영조에 의해 내려진 시호이며, 이해 7월 양주 남쪽 중량포 배봉산 기슭에 초장하고 사도세자의 묘를 수은묘(垂恩墓)라 하였다.
그 후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시호를 장헌(莊獻)이라 하고 궁호를 경모(景慕), 원호(園號)를 영우(永祐)라 고쳤다. 이어 영우원이 너무 좁다고 생각한 정조께서 수원 화산으로 천봉하고 원호를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 지금 우리가 융릉이라 부르는 것은 고종 때 장조로 추존함에 따른 것이다.
정조는 조선시대의 어느 능원보다도 후하고 화려하게 현륭원을 조상했다. 이미 폐지키로 한 병풍석에 모란과 연꽃문양을 조각하였으며, 문인석까지도 만들어 세웠다. 게다가 장명등은 구름문양의 다리가 달린 품격 높은 새로운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능에 진열된 석물에서도 비운에 유명을 달리한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애틋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문인석을 보면 종래의 복두 대신에 금관을 씌웠으며, 원제에 없는 무인석을 배열하는 등 19세기 이후의 능석물(陵石物) 양식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그리움과 사랑은 ‘한달에 거둥이 스물 아홉 번’이란 속담에서 잘 드러난다. 그만큼 능행이 잦았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능을 지키는 관리에 대한 애정과 대우가 남달랐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능참봉’에 얽힌 전설이 많이 전하는 것도 이러한 까닭인 것이다. 능이 들어선 곳은 안녕리로 편안할 안(安)자, 편안할 영(寧)자를 쓰지만 그 곳에 사는 백성들의 고통은 심하였던 듯하다. 임금의 총애를 받는 능참봉의 횡포가 만만치 않았던 듯하다. 다음의 이야기가 그를 뒷받침하고 있다.
안녕리에 사는 농부 한 사람이 매일 능참봉에게 두들겨 맞았다. 보다못한 그의 아내가, “당신 그 왜 그렇게 날마다 맞고만 오시오? 다른 사람들처럼 약삭빠르게 하구 매를 맞질 말아야지.” “낸들 어떻게 하겠소?” “아무런 방법이 없는 걸.” 아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그럴 게 아니라 좋은 생선 하나 갖고 임금님께 바치고 벼슬 하나 얻으시오.” 이 말을 들은 농부는 매를 맞는 것도 지겹거니와, 아내의 말도 일리가 있다 싶어 민어를 한 마리 구했다.
민어를 구한 농부는 잠방이 등거리에 꿰차고 한양으로 떠났다. 민어를 짊어지고 한양에 올라온 농부는 임금이 계신 대궐 앞에 가서 문지기에게 들여보내 달라고 하니, “이거 어디 촌놈이 와서 수작을 하느냐” 며 내 쫓았다. “아, 그게 아니오. 나는 저 능 있는 마을에서 왔는데 꼭 임금님을 뵙고 가겠소.”
능 있는 곳이라면 수원의 화산이 아닌가? 능 있는 곳에서 왔다는 말에 문지기는 안으로 들어가서 고했다. “거 능 있는 마을인 수원 안녕리에서 온 백성이 임금님을 뵙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들어오라 그래라.” 이렇게 해서 그 사람은 민어를 짊어지고 대궐로 들어갔다.
임금께서, “너 그게 뭐냐?” “예, 제가 임금님께 달리 대접할 게 없어서 비록 하찮은 생선이라도 한 마리 드리려고 가지고 왔습니다.” 임금이 가만 생각하니 기특하기가 짝이 없었다. 그래서 임금은 농부를 대접을 잘하게 하였다. 대접을 잘 받은 농부가 벌떡 일어서며, “저 가겠습니다.” 라고 하니, “네 소원이 무어냐, 네 소원 하나 들어주마.” 라고 임금이 묻는 것이었다.
그러자, “다른 거 소용없고 집강벼슬이나 하나 시켜주십시오. 그것도 대대로요.” 날마다 매맞는 것이 억울해 능참봉보다 높은 벼슬을 하고 싶어한 것이다. 그때부터 이 사람 집안은 대대로 집강벼슬을 했으며 능참봉으로부터 괄세를 받지 않은 것은 물론이라고 전해진다.
물론 사실여부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정황으로 보아 능참봉이 횡포를 부렸을 가능성은 있다. 이 이야기는 능참봉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농부에게 맞추어지는 것도 또한 아니다.
적어도 오늘날까지도 이 이야기가 전한다는 것은 백성의 아픔을 먼저 알고 치유하여 주는 것이 관리요 임금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행정단위를 시로 한다면 시장이요 시의 공무원들이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해야한다는 말이다. 민원이 제기되기 전 민원의 현장을 살피고 해결하는 것이 곧 공직에 몸담은 이들의 역할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