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설화

미투리 장사로 떼돈

작성자 : 수원문화원 날짜 : 20/12/08 13:55 조회 : 1242

화성의 숨결을 찾아서

미투리장사로 떼돈 번 이야기

예부터 전하는 이야기 가운데 계모와 전실 자식에 얽힌 이야기가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콩쥐팥쥐’, ‘장화홍련전’ 등이 그 대표격이 된다. ‘계모형(繼母型)’의 이야기는 오랜 세월 세상살이의 애환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어머니들의 ‘내 배 앓아 낳은 자식’이라든가,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식의 표현은 남의 자식에 대한 거리감을 두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이가 문제를 일으켜도 그 아이와 어울린 남의 집 자식 때문이지 우리 아이가 그럴 리 없다는 확고한 믿음은 한 편 아름답고 한편 어리석다. 세상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믿어줄 수 있다는 것은 그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아름답게만 여겨지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 내 것 내 자식 하는 식의 믿음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그럴 수 있다면 상대도 그럴 수 있음이 인정되어야 한다. 어찌 되었든 다음의 이야기는 내 자식에만 집착한 계모의 어리석음과 부당한 처우에도 스스로의 노력으로 성공을 거둔 전실자식의 성공담을 다루고 있다.

소년이 살았다 전하는 곳은 밤밭으로 지금의 성균관대 전철역 부근이다. 행정동명으로는 율전동(栗田洞)이 된다.

아침 일찍 풀잎의 이슬이 마르기도 전에 풀을 한 짐 해갔고 집에와 부리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계모는 데리고 들어온 아들은 아침에 아무것도 안 했는데 찬밥이라도 보리밥을 주고 자기는 보리죽을 주니 화가 났다. 숟가락으로 죽그릇을 콱콱 짓이기며 이걸 사람 먹으라고 주는거냐 했다. 아, 이자식아 너는 이것만 먹어도 되지 왜 투정이냐고 그러면서 소년의 머리꼬랭이를 움켜쥐고 빨래방망이로 등어리를 때렸다.

그러니까 화가 나서 뿌리치고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뛰어나오긴 하였지만 갈 데가 없으니까 시내로 들어왔다. 와보니 아는 집도 없고 갈 데가 없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알 수 잇는 집이 있었다. 소장사를 하던 아버지가 돈을 빌려쓰고 갚곤 하던 객주집이었다. 그 집에 들어서니 객주집 주인 노인이 “아니, 니가 어쩐일이냐.” “아버지가 돈좀 가져오라구 그래서 왔어요.” “그래, 얼마를 가져오라더냐?” “삼백냥이요.” “그래, 너 어음 가져왔냐?” “어음 안 가져왔어요.” “어음도 안 가지고 무슨 돈을 달라고 그러느냐?” “모르겠습니다. 급하다고 그러십니다.” 그래 객주집 주인은 이제까지는 많이 빌려야 이백냥이었는데 삼백냥을 달라니 이상도 하였지만 워낙 신용이 있는 사람이라 삼백냥을 내어주었다.

그래 삼백냥을 짊어지고 그 길로 서울을 올라갔다. 지금의 남대문 시장에서 무엇을 살까 궁리하다가 삼백냥으로 미투리를 모두 샀다. 신창안(남대문) 미투리를 소에다 실어 원산을 올라갔다. 일본이 원산 인천 부산의 항구를 개척하던 때로 항만공사에 많은 사람들이 동원이 되어와 있었다. 막일을 하는 터라 짚신은 하루도 못되어 다 낡아버렸다. 그래 짚신이 왔다고 하니 너도나도 살려고 아우성이었다. 그래 삼백냥 어치의 짚신을 모두 팔고 나니 천냥이 넘었다.

그래 이번에는 숙곡의 베를 사 가지고 서울로 왔다. 서울에서 다시 수원을 와서 객주집에다 짐을 맡기고 숙박을 했다. 객주집 주인이 보니 나이도 어린 아이가 물건도 많이 가지고 왔는데 장사하던 사람 같지가 않았다. 그래 “얘, 너 장사 처음하지 않니?” “예, 처음인데요.”“ 얘, 너 뒤에 도둑놈이 지금 뒤따르니까 너 조심해라.” 그렇게 겁을 주었다. “그러니 너 내말을 들어야한다. 만약 바깥에 나가면 큰일난다. 그러니까 꼭 안에만 있어야 한다.” 이러고는 자기 집 건너방을 치워주고 숙식을 시켰다.

그렇게 몇 일이 흘렀다. 우연히 변소를 가서 일을 보고있는데 집 주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물건은 풍족하겠지.” “아, 있다뿐이여.” “물건도 좋더라고.” “그러면 내가 천 오백냥에 드릴테니 그냥 있으면 안돼.” “아 그러자구.” 주인의 수작하는 말은 다 들은 소년은 시치밀 딱 떼고 있는데 주인이 와서는 “얘, 너 그 물건 팔지 않을래?” “아 팔아야지요.” “너 얼마를 받을래, 얼마에 팔을래.” 하니까, “아 주인 아저씨께서 하시는대로 해야지요.” “너 천 오백냥에 팔어라.” “그렇게는 안 팔아요.” “아 거 안 팔면 어떡하니?” “지금도 값이 이천냥이나 되는데 천 오백냥에 팔아요?” “저도 밖에서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입맛을 쩍쩍 다시면서 “그럼 할 수 없지.” 그 후에 물건값은 자꾸만 올라 삼천냥에 이르렀다. 그래서 삼천냥을 벌수가 있었다. 삼천냥을 받아서 돈을 꾸었던 객주집을 찾아갔다. 꾼 돈 삼백냥과 이자를 갚고 객주집 노인에게 절을 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하니 노인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있다가 노인은 "나는 이거 떼인 줄 알았다. 너희가 오막살이 집 하나밖에 없는데 아 삼백냥 그걸 뭘로 갚나?" 그렇게 인사를 하고 아버지를 찾았으나 아버지는 별 말씀을 하지 않았다. 그 후로도 소년은 장사를 해서 많은 돈을 벌었고 큰 부자가 되었다 한다.

자신이 구박하여 집을 나가게 했던 전실자식이 성공하여 돌아왔을 때 계모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래도 내가 구박하였기에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다고 자신이 구박한 것도 공이라고 생각하였을까?

어찌 되었든, 자신의 자식과 남의 자식을 치우침 없는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