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설화

대황교 유래

작성자 : 수원문화원 날짜 : 20/12/08 13:48 조회 : 1227

대황교의 유래

광교산에서 발원한 수원천이 수원시내를 관통하여 매교동, 버드내를 지나 수원 비행장 아래쪽에서 황구지천과 만나게 된다. 여기에 대황교라는 이름의 다리가 있었다.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대황교가 놓인 지점에서 수원의 4대천인 수원천, 황구지천, 서호천, 원천천이 만나게 된다.

대황교는 정조께서 아버지 장헌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을 다니실 때 건너다니시던 다리이다. 그 시절까지만 해도 중국에서는 우리나라를 자기네 속국인 것처럼 여겨 얕잡아 보고 하대를 하며, 모든 일에 간섭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대황교’란 다리의 이름을 두고 중국의 시비가 없을 리 만무했다. 이에 이름이 붙여진 유래가 전하기에 소개하기로 한다.

‘조선에서 어떻게 대황교란 이름을 다리에다가 붙여서 쓰느냐.’, ‘조그만 나라가 우리에게 말도 없이 마음대로.’ 하는 식으로 중국만이 황제란 말을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다른 의논할 일도 있었지만, 우선 대황교란 다리 이름에 대하여 질책을 할 생각으로 사신을 중국에 보내라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적임자를 뽑아서 중국에 사신으로 보내게 되었다.

중국에 가는데는 많은 시일이 걸렸다. 육로로 가도 그렇고 해로로 간다 해도 그랬다. 조선 사신이 중국에 도착하니 중국 임금의 어머니의 초상이 났다. 조선 사신은 무엇 보다 먼저 조상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을 했다. 상 옷을 입고 예의를 갖추어 상주인 임금에게 조상을 했다.

상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의아한 눈초리를 바라보면서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을 떠나온 지 한 달은 되었을 텐데, 도착하자마자 상 옷을 꺼내 입고 조상을 하였으니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그 연유를 물었다. “원로에서 오시느라 고생이 심했을 텐데, 오자마자 조상을 해주니 고맙소만은, 상 옷은 어찌 된 것이오?” 하고 묻자, 조선 사신은 말했다. “제가 우리나라를 떠날 때 중국의 천기를 보고 모든 것을 점쳐 보니까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에 임금께서 상을 당하실 운수이므로, 그래서 준비를 해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중국임금은 생각을 했다. 한 달 후에 자기 어머니가 돌아 갈 것을 다 알고 미리 준비를 해가지고 와서 상옷까지 입고 예의를 갖추어 조상을 해주었으니 고맙기도 하거니와 대단하게 느껴졌다. 또한 그 성의에 대해서도 오히려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 임금은 당초에 생각했던 대황교 건에 대한 꾸짖음 같은 것은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보다 더한 일이 있더라도, 조선은 업신여길 수 없는 선견지명이 있는 나라이구나 하고, 이 유명한 사람을 책하여들다간 오히려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까 아무 것도 묻지 말고 덮어두어야겠다고 중국임금은 생각을 했다.

중국 임금은 명을 내렸다. 조선 사신이 먼 기에 오느라고 피곤했을 테니, 잘 대접을 하라고 했다. 조선 사신은 그곳에 있는 동안 융숭한 대접을 받고 사신으로서의 목적한 바 할 일을 다 마치고, 아무 일 없이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걱정을 했던 대황교란 다리의 이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물음이나 책망도 듣지 아니하고 사신의 기지로서 해결이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