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설화
노송지대의 돌무데기
화성의 숨결을 찾아서
노송지대의 돌무데기
김용국
파장동의 법화당에서 산업도로를 따라 남으로 내려오다 보면 우측으로 길이 하나있다. 노송지대로 들어서는 길이다. 노송지대는 정조께서 화성을 축성하고 신도시인 수원을 가꾸기 위해 내탕금(內帑金-임금이 개인적 용도로 쓰는 돈) 1,000냥을 하사하여 조성한 것이다.
청주에 들어서면 길가의 플라타너스 터널이 오가는 이들을 맞이하듯, 수원에 들어서면 200년 이상 된 노송이 양 길가에서 반긴다. 겨울철 함박눈이라도 내리면 그야말로 탄성이 절로 나오게 하는 승경(勝景)이 아닐 수 없다.
노송지대에는 유달리 전하는 이야기가 많은 지역이다. 이는 그만큼 이 지역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또한 유서가 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선 노송 한 그루에 그 얽힌 이야기가 전한다.
산업도로에서 노송지대로 갈라져 들어오는 길가에 곧게 자라있는 노송 한 그루가 있다. 이 나무가 오늘에 남게된 데에는 다음의 사연이 있다.
80여 년 전 어떤 사람이 이 나무를 베어가려고 하다가 나무가 어찌도 곧고 보기가 좋던지 차마 벨 수가 없어 그냥 둔 것이라 한다. 이렇듯 우리의 역사는 한 사람의 순간적 판단에 의해 달라질 수가 있는 것인가 보다. 이 한 그루의 소나무가 노송지대로 들어서는 초입임을 알리는 이정표의 구실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전하는 이야기 가운데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삼풍농원의 맞은 편에는 일명 ‘도깨비터’라 불리는 자리가 있다. 전하는 말에 이 곳은 천하의 길지(吉地)로 부를 가져오는 곳이라 한다. 그런데 정작 지금 이 곳에 거주하고 있는 이는 그리 풍족해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도깨비가 매년 자신을 위해 제를 올려 줄 것을 바라고 있는데 이 곳의 사람이 제를 올려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돌무데기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돌무데기는 이목동 버스정류장에서 동원고등학교 방향으로 있었던 것으로 서낭당이라고도 불리었음을 보면 이 마을의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던 듯 하다. 한편 이 마을에는 작은 서낭과 큰 서낭이 있었고 돌무데기는 큰 서낭 바로 옆에 있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아무튼 전하는 이야기는 이렇다. 옛날 이곳에 터를 잡고 살던 부자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부자가 장자임으로 이 집을 장자댁이라 불렀다. 집의 위치가 옛날에는 한양으로 가는 길목인데다 부자인 관계로 많은 손님이 드나들었다. 이 집의 며느리는 손님을 치르느라 힘도 들고 재산이 축나는 것이 언제나 걱정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집의 며느리는 시주하러 온 스님에게 손님이 오지 않게 하는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다.
스님이 “왜 없습니까. 있지요.” “어떻게 하면 되죠.” 며느리가 재차 물었다. “이 집에서 보니 저기 수리산(修理山-안양에 있는 산)의 두 봉우리가 보이는데 이는 이 집에 도둑놈이 날 징조다. 그러니 이 집에서 수리산의 봉우리가 보이지 않게 하면 손님의 발길도 끊어지고 집안의 화도 면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일러주었다.
이에 며느리는 집안의 어른들께는 손님의 발길을 끊을 수 있다고는 말하지 않고, 장차 자손 중에 도둑놈이 나온다고 하니, 수리산봉우리가 보이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고 했다. 집안에서는 회의를 한 결과 사람들을 동원하여 수리산의 봉우리가 보이지 않도록 돌무더기를 쌓았다.
수리산봉우리가 보이지 않게 되자 정말로 손님의 발길이 끊어졌다. 돌무더기를 쌓느라고 재산도 많이 줄었고, 손님의 발길이 끊기면서 이 집도 망해버렸다. ‘사람의 집에는 사람이 끓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어찌 보면 시답잖은 말 같으나 이는 세상살이의 이치를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돼지우리엔 돼지가 들끓어야 하듯, 사람의 집엔 사람으로 들끓어야 한다. 그 교훈이 이 한편의 설화 속에 담겨져 있다.
노송지대도 예전만큼 사람의 발길이 잦지가 않다. 개발의 논리에 한 켠으로 비껴선 노송들이 200여 년 세월의 풍상을 견디면서 함묵하고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 노송들을 자식과 같이 보살피고 있는 의로운 분이 계시다는 점이다. 구순(九旬)을 바라보는 김인기 옹이시다. 지면을 통해 어르신께 다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