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설화
광수터 금불상
02.10.14 화성의 숨결을 찾아서..
광수터 금불상
김용국
아시는 바와 같이 수원의 진산(鎭山)인 광교산에는 여든아홉 개의 크고 작은 절이 있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보이는 곳마다 절이 있었고 부처가 있었으리라. 지금은 비록 그 많던 절들을 볼 수는 없지만, 광교산에 있었다 전하는 절터엔 절의 흥망과 성쇠를 암시하는 이야기들이 전하여지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또한 광교산 중턱에 이름은 전하지 않으나 쇠절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그 절의 주인이 광수라는 사람이었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만 그 절이 땅속에 묻혀 버렸다고 한다. 그 때 그 쇠절의 주인인 광수라는 중도 절과 함께 매장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지만 한편, 절의 중인 광수가 어디론가 가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흔히 전하는 이야기의 유형으로 보면 이렇게 절과 함께 중이 사라졌다면, 그가 보통의 중이 아니었으며 뛰어난 도력(道力)을 가진 이인(異人)으로 산신(山神)이 되었다는 식으로 전하여 지는데, 광수라는 중이 사라진 자취는 묘연하지만 어떤 능력을 가지고있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전하지 않는 점이 예사의 비슷한 이야기 유형과는 차이가 있다.
아무튼 그 쇠절에는 금불상이 하나 있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금불상은 절이 매장될 때 함께 묻혔다고 한다. 훗날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 금불상을 캐려고 쇠절이 파묻힌 자리를 파내려 가면 갑자기 하늘에서 벼락이 쳐서 죽곤 했다. 그래서 그 절터가 현재도 그대로 남아 있고, 금불상도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마을 이름도 처음에는 쇠절골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쇠죽골이라고 부른다. 그 골짜기도 그때 그 중의 이름을 따서 광수터 골짜기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1989년 수원시사에 실린 이야기다.
그런데 198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펴낸 한국구비문학대계 수원.화성편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실리지 않았다. 그 뒤 어떤 기록에도 ‘광수터 금불상’에 얽힌 이야기는 전하지 않는다. 당시 수원시사의 구비문학편을 집필하셨던 고(故) 안익승 선생의 1996년 ‘수원의 맥’이란 책에도 실리지 않았다. 이상을 미루어 볼 때, 이 이야기의 마지막 전승자가 안익승 선생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1989년 수원시사를 집필할 당시까지만 하여도 기억하고 있던 것을 1996년에는 기억이 혼미하여 누락시켰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물론 1981년 한국구비문학대계의 제보자도 안인승선생이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고장의 구전설화의 산 증인을 잃은 격이 되고, 선생의 기억을 오늘까지 계승해 내지 못한 부끄럼을 지니게 된다. 혹, 선생께서 다른 이야기들과 혼동하여 1989년 수원시사에 기록하였다는 추측은 선생이 살아오신 인생의 역정(歷程)을 생각할 때 개연성이 적다.
우선 선생님의 기록을 토대로 그 발생지가 어디인가를 추정하고 재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앞선다. 쇠절의 의미가 무엇인지 확적치는 않다. 지명과 어의를 토대로 추정할 뿐이다. 다행히도 1999년 발간된 수원지명총람에 ‘쇠죽골’이란 지명이 나오고 있다.
그를 토대로 가장 개연성이 있는 지역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먼저의 기록에 쇠절골을 쇠죽골로 부르고 있다고 했다. 지명총람에 쇠죽골이란 지명은 이의동, 원천동, 송죽동 등에 전하고 있다. 여기서 원천동은 광교산과 접한 지역이 아니니 제외하고 나면, 가능성은 이의동과 송죽동으로 축소된다. 그런데 수원지명총람에서 송죽동의 골짜기로 보기에는 그 해석이 석연치 않다. ‘쇠-’를 ‘사이’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는 까닭에서이다. 그러나 주민들 가운데 ‘소에게 쇠죽이나 여물을 먹이던 곳이기에 쇠죽골이라 한다.’는 제보는 이 지역이 쇠절골일 가능성을 열어둔다.
그런데 한편, 마을의 이름이 쇠죽골이라 하였으니 이도 이의동의 쇠죽골이 마을의 이름에서 유해한 것이라는 기록보다는 개연성이 적다. 그렇다면 ‘광수터 금불상’이 전하는 지역은 이의동이 가장 가능성이 높아진다. 비단 마을의 이름이냐 아니냐를 떠나 그 이름이 얼마나 마을과 관련이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단지 소에게 여물을 먹이던 곳이라 한다면 원천동도 제외가 될 수는 없다.
‘-골’이란 골짜기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서이다. 이의동에는 여천 수계에 속하는 하천으로, 1997년 9월 소하천으로 지정된 쇠죽골천이라는 하천이 있으므로 ‘광수터 금불상’의 발생지는 이의동으로 봄이 옳을 듯하다.
여하튼 이러한 유의 설화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내 것이 아닌 것을 탐하지 말라는 것일 것이다. 잠시 권모술수로 남의 것을 내 것인양 흉내낼 수는 있을지 몰라도 내 것 아닌 것은 오래 지니지 못한다. 결국 제 주인을 찾아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잠시 내 수중에 있다고 함부로 다루고 사용해서는 큰 낭패를 보게된다.
아마도 이규보 선생이 ‘차마설(借馬說)’에서 우리에게 주고자 한 교훈도 이러한 것이 아닌가 한다. 수분지족(守分知足)이 곧 행복에 이르는 첩경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