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설화

광교산

작성자 : 수원문화원 날짜 : 20/12/08 13:14 조회 : 1541

광교산(光敎山)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수원의 진산(鎭山)을 광교산이라 했다. 광교란 이름의 유래를 보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지난주에 소개한 팔달산이 조선 태조에 의하여 명명된 것이라면 광교는 고려 태조에 의하여 이름이 붙여진다. 두 왕조의 첫 임금에 의해 명명된 두 개의 산을 갖고 있는 도시가 바로 수원이다.

이는 어쩌면 현대사에서 수원이 점하는 위치와도 무관한 것은 아닌 듯 하다. 광교산(光敎山)의 본래 이름은 광옥산(光獄山)이었다 한다. 고려(高麗)야사(野史)에 의하면 928년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친정(親征)하고 귀경(歸京)하는 길에 광옥산 행궁에서 군사들을 위로할 때, 이 산에서 광채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광경을 보고, 부처의 가르침을 주는 산이라 하여 ‘광교’란 이름을 내렸다.

이렇듯 광교산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였을 것이라는 사실은 창성사지, 미학사지, 성복사지 등 89개의 크고 작은 암자가 있었다고 전하는 속설과 무관하지 않다. 이렇듯 많은 절터가 전한다는 사실은 풍수지리와 매우 긴밀한 연관이 있음을 시사한다. 학자와 고승들이 명산을 찾아 학문에 힘쓰고 도를 닦으며 풍류를 즐겼음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수원의 진산, 광교산은 학사공 이고, 송산 조견, 고운 최치원 등이 머물면서 수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최치원이 종을 매달아 놓고 종루에 올라 사방을 조망하였다는 ‘종대봉’과 ‘문암’, 학사고 이고가 풍류를 즐겼다는 ‘망천’이란 지명이 이를 증명한다.

하광교동에 문암골이라는 곳에 문암(文巖)이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곳은 이고 선생이 광교산 기슭에 은거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제자들과 더불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하여 문암이라 불렀다하며, 한편으로는 신라말의 학자인 고운(孤雲) 최치원이 즐겨찾던 바위라 하여 문암이라 불린다고도 한다.

또한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바위의 모양이 문어와 같다고 하여 문암이라 한다고도 한다.

또한 광교 저수지에는 ‘망천’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이는 이고 선생이 세상의 번잡함을 잊고 풍류를 즐기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밖에도 광교산에는 많은 일화와 전설이 전한다.

그 중 김준룡장군의 전승비에 대하여 소개하면 이렇다. 나만갑의 ‘병자록’에, “전라병사 김준룡은 빠르고 용감한 군사를 뽑아서 사면에서 밖을 향해 공격케 하고 양식은 진 가운데 두는 방법으로 적과 맞서 사울 계책을 세웠다. 날마다 적이 공격해 왔지만, 그때마다 적을 수없이 죽이고 적의 명장도 죽였는데, 그 중에는 청 태종의 매부도 있었다.”고 전한다.

실제로 김준룡장군은 병자호란시 광교산에서 청 태종의 사위 양길리를 포함, 3명의 적장을 사살하는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을 사살하였다 한다. 천궁은 광교산 계곡마다에 쌓인 동료들의 시체를 태우며 처절히 울었다 한다.

광교산의 ‘호항골’이란 지명은 여기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충양공 김준룡 전승지’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자연 암벽에 음각된 것으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수원의 화성(華城)을 축성할 때, 축성에 필요한 석재를 구하러 광교산에 갔던 사람들로부터 이 말을 전해 듣고 채제공이 세운 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