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설화
거북산당
2003년 4월 7일
거북산당 화성의 화성의 숨결을 찾아서...
김용국
마을 주민들간에 행하여지는 공동제의는 지리적 여건과 함께 지역 주민의 안녕과 복을 기원하는 형식으로 자리잡았다. 마을의 역사가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또한 그 마을의 제의는 그만큼의 역사를 지니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마을제의는 일제강점기와 소위 잘살기 운동으로 불리는 ‘새마을운동’에 의하여 그 존립의 위기가 닥쳐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에 마을제의가 계승된다는 것은 주민들간의 화합이 그만큼 긴밀함을 의미한다.
1998년 발간된 ‘수원시사’에서 소개된 거북산당을 소개하고자 한다.
화성의 건설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는 거북산당은 그 지역이 시장으로 육성되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아니 매우 긴밀하며 오늘날에도 그 곳에 시장이 있고 마을의 공동제의가 있다.
화성의 건립시기와 기원을 함께하는 거북산당은 초기에는 터주가리 형태로 되어있었으며 정조14년인 1790년 거북산당이 생겨났다. 거북산당은 영동시장 번영회에 의하여 위해진다는 점이 특이는 것으로 시장사람들은 당고사를 지내지 않으면 시장에 불이 잘 나기 때문에 번영회에서 당을 위한다고 한다. 제당의 명칭이 거북산당 또는 거북도당으로 불리워지는 것은 이곳이 구천동과 가깝고 주위에 물이 많은 곳이며, 풍수지리적으로도 불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의 상징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의 당제는 점차 시장공동체의 번영보다는 개인적 치성의 장소로 바뀌고 있는 경향이 있으나 시장에 화재가 발생하고 시장 자체에 문제가 생겨 공동의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다시 옛것을 찾는 태도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의장소 영동시장의 번영과 상인들의 평안을 위하여 1790년에 만들어진 도당으로, 1967년에 이씨성을 가진 무속인이 자신의 재산을 들여 당집을 짓고 거북산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금은 이씨 할머니의 외조카인 임씨 할머니가 관리하고 있다. 제당은 기와지붕의 한 칸으로 내부에는 제단 중앙에 염라대왕과 거북도당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탱화를 걸고, 그 오른 쪽에 칠성 등의 무속신들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제단 위에는 제기와 제물이 올려져 있다. 좌측에는 군웅단지를 모셨는데, 단지 속에는 원래 쌀이 담겨 있었으나, 지금은 쌀 대신 돈이 들어 있다. 그 앞에도 별도의 작은 단을 마련하고 촛대와 정화수 그릇, 향을 두었다.
이처럼 거북산당의 성격은 매우 복합적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우선 산당이란 명칭에서 보듯이 도당할아버지의 성격은 산신임을 알 수 있다. 그 신체에도 처음에는 하얀 기(旗)로써 산신할아버지를 표현했으나 그 다음에는 천에 그린 탱화(화주라고도 함)가 있었고, 마지막으로 무속인에 의해 당집을 지으면서 각종 신격들, 즉 무속계통의 신들이 함께 모셔지게 되었던 것이다. 현재의 당 건물을 짓기 전에는 우묵하게 된 땅에 짚주저리로 당터주가리를 만들고 그 안에 하얀 기를 넣어둔 형태였다.
치성자들이 떡을 해오면 안에 조금 떼어놓고, 터주가리 안에 줄을 매고 소지종이를 끼워 두었다. 현재의 건물을 짓기 위해 땅을 팠을 때 엽전이 나왔다고 한다. 원래 터주가리 옆에는 매우 큰 연못이 있었으며, 그 옆에 거북처럼 생긴 돌이 있었으나 소실되었다. 지금 제당이 있는 공간은 예전보다 훨씬 좁아진 것이며, 도시개발 과정에서 연못도 메꾸어졌다.
제의 절차 및 내용 매년 10월 7일에 소머리나 돼지머리. 시루떡. 과일 등으로 제사상을 차리고 아침부터 굿을 한다. 번영회에서 당고사를 위한 지원이 줄어들자 만신들이 소머리 등의 제물을 준비하고 있다한다. 당주는 제를 올리기 하루 전에 미리 집에서 위하고 있는 신들에게 시루떡을 올린다. 당굿은 만신의 청신(請神)과 치성 후 시장상인들의 개별 치성으로 이어진다. 치성자가 오는대로 제를 올려 위해주기 때문에 제의가 끝나는 시간은 일정하지는 않지만, 요즘은 치성자의 수가 줄어 예전과 같은 흥성스러움을 찾기는 힘들다.
아무튼 지동의 역사와 함께해 온 ‘거북산당’이 예전의 그 흥성스러움으로 거듭나 수원시민들의 향수와 흥취를 불러오는 축제로 자리잡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