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제20차 역사문화탐방 안내
작성자 : 수원문화원
날짜 : 07/01/31 11:24 조회 : 3686
본원에서는 월 1회 정기적으로 국내 역사문화탐방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문화유산을 올바로 이해하고 생명력 넘치는 살아있는 문화재를 통해 본원의 회원 개인 개인에게 자긍심과 희망을 주고자 합니다.
제20차 역사문화탐방은 절경이 있는 고장, 역사가 숨쉬는 고장 예산을 탐방하고자 합니다.
제20차 문화탐방에 회원님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다립니다.
○ 일 시 : 2007년 2월 8일(목) 오전 8시 정각 출발
○ 장 소 : 충남 예산(수덕사. 남연군묘. 윤봉길 생가. 추사고택)
○ 출발장소 : 수원문화원(수원시민회관 주차장)
○ 회 비 : 회원 20,000원 / 비회원 30,000원 선납(※중식 포함)
○ 인 원 : 45명 (선착순 마감)
○ 준 비 물 : 카메라, 필기도구,간단한 간식과 물.
○ 접수 및 문의 : 수원문화원 사무국 ☎ 244-2161∼3
???★★ 역사문화탐방 회비 납부는 계좌이체가 가능합니다.★★
????( 기업은행 111-114091-01-021 / 예금주 : 수원문화원 )
?※ 문화탐방 코스는 현지 사정에 의하여 변경될 수 있습니다. ※
예산문화유적답사
박천우(장안대학 한국사교수)
덕숭산 수덕사
수덕사는 대한 불교조계종 제 7교구 본사로 예산, 서산, 홍성, 태안, 당진 지역을 엮어 부르는 내포 땅에서 가장 큰 절이다.
수덕사 답사의 백미는 국보 제 49호인 대웅전에 있다. 대웅전은 1937년 수리할 때 묵서명이 발견됨으로써 1308년(고려 충렬왕 34년)에 건립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대웅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중 하나이며 이 자료를 기준으로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등 고려시대 건축물들의 나이를 짐작하게 되었다.
수덕사 대웅전은 기품 있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주심포계 단층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아주 단순하기 이를 데 없지만 이것이 대웅전 아름다움의 바탕이다. 쓸데없는 장식을 전혀 하지 않은 소박함, 정확한 균형에서 오는 안정감, 빛바랜 단청들이 보여주는 담백함, 그리고 목조건물로서 근 700여 년의 세월을 버텨낸 견실함이 수덕사 대웅전의 가치를 높여준다.
또 가운데가 슬쩍 부푼 배흘림기둥이며, 단순한듯하면서도 치밀하게 깎은 문짝의 창살무늬 등 하나 하나 감칠 맛 나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오른쪽 꽃밭에서 보면 노란색으로 깔끔하게 마무리되어 있는 벽면과 시원한 지붕선이 간결하고 견고한 대웅전의 옆모습을 완성한다.
대웅전 왼쪽에서 보면 수덕각시의 전설이 서린 집채만한 바위가 있는데 관음화신이 수덕각시의 모습으로 나타나 절을 창건하고는 이 바위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여 관음바위라 부른다.
절 마당에 있는 높이 4m의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이다. 1층과 2층 옥개석 귀퉁이 일부가 파손되었을 뿐 전체적으로 잘 보존된 석탑은 깔끔한 비례로 안정감을 준다.
수덕사는 백제 말 숭제법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한말에 경허스님이 머물면서 선풍을 일으켰고, 1898년 경허의 제자 만공스님이 중창한 뒤 많은 후학들을 배출하여 대찰로서의 품격을 갖추었다.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은 많은 일화를 전한다. 경허스님은 문둥병 걸린 여자와 동침하는가 하면 술에 취해 법당에 오르는 등 계율에 얽매이지 않은 행동으로 파계승 소리를 들었다. 만공스님은 젊은 여자의 허벅지를 베고 눕지 않으면 잠이 안 온다하여 일곱 여자의 허벅다리를 베고 자 ‘칠선녀와 선(禪)’이라는 말까지 만들어냈다. 두 스님 모두 일상적인 안목에서 보면 파계승이지만 대중 속에서 선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선의 혁명가로 평가받고 있다. 만공스님은 일제시대 31본산 주지회의에 참석하여 조선 불교는 일본 불교와 합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본 총독에게 호령했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만공스님의 자취를 찾아보기 위해서는 수덕사 뒤편 덕숭산 등산로를 올라야 한다. 정혜사까지 연결된 1200계단을 밟아 올라가다 보면 먼저 소림초당의 초가지붕이 오른편으로 보인다. 1925년에 만공스님이 손수 터 잡고 설계하여 남은 여생을 보낸 초가이다. 계속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향운각, 금선대를 지나 만공스님의 사리가 모셔진 만공탑이 있다. 동경 미술대학 출신인 제자 박중은 선사가 설계한 이 탑은 동구란 구슬모양에 탑명은 한글로 새긴 현대적 작품이다. 만공탑 옆에 만공스님이 세운 높이 25척의 미륵불이 서 있다. 자연암을 사용하였으나 마애불로 하지 않고 입상으로 조각한 것이 특이하다.
계단의 끝에 정혜사가 있다. 정혜사는 스님들의 선방으로 조용하고 잘 정돈되어 있다. 마당 끝에서 내려다보면 수덕사의 전경을 비롯하여 홍성 일대의 평원을 내려다보는 광경이 일품이다.
정혜사에서 내려다보면 수덕사 대웅전에서 오른편으로 덕숭총림이 보인다. 현대식 석조 2층 건물인 이곳은 전국의 여승들이 참선하는 수도장의 종가이다. 덕숭총림의 아래쪽 환희대도 비구니 스님들이 머무는 곳이다.
또한 이곳은「청춘을 불사르고」로 유명한 김일엽 스님이 기거하다 열반한 곳이다. 개화시대 신여성의 대표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잡지인 『신여성』을 창간한 일엽스님은 이화학당에서 공부하고 일본에서 수학하여 화가 나혜석과 함께 대담한 행동과 필설로 유명했다. 20세까지는 기독교도였으나 1933년 수덕사에 입산, 견성암에 머물며 만공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수덕여관은 고암 이응로 화백의 본부인이 운영하였는데 이곳에는 고암이 새긴 암각화가 남아 있다. 앞마당 널찍한 바위 두 채에 새겨진 그림들은 한글의 자모들이 풀어져 서로 엉키면서 아름답게 풀려가는 조화를 표현한 문자추상화이다. 고암이 이곳에 머물렀던 시기는 본부인을 버리고 자신의 제자와 재혼하고 난 뒤였다. 고암의 본부인은 고암이 동백림사건으로 잡혀 들어가자 비록 자신을 버렸지만 온갖 옥바라지를 해내고 이곳에서 요양까지 시켰다. 하지만 고암은 이 암각화만을 남기고 파리로 돌아가 죽는 날까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윤봉길 의사 사적지(사적 제229호)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는 윤봉길(1908-1932) 의사의 사적지가 있다. 이곳에는 생가와 네 살 때부터 중국 망명 전까지 살았던 집이 있다. 생가는 광현당(光顯堂)이라는 당호가 붙어 있다. 옛 집은 네 살 때 옮겨온 것으로 이 집에는 ‘한국을 건져내는 집’이라는 뜻으로 윤봉길 의사가 지은 저한당(狙韓堂)이라는 당호가 있다.
윤봉길은 어릴 때 본명이 우의(禹儀)였고 봉길(奉吉)은 별명이며 아호는 매헌이다. 그가 지은 『자서략력(自書略歷)』에 따르면 그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품이었다. 때로 씨름에 지는 날이면 하루 종일 맞붙어서 이길 때까지 붙들고 늘어져서 별명이 살가지(삵쾡이)였다.
1918년에 덕산보통학교에 들어갔지만 식민지 노예교육을 받을 수 없다며 자퇴하였다. 사숙에서 한학을 배우며 애국심을 키우던 중 1926년 농민계몽과 농촌부흥운동에 뛰어 들었다. 그는 야학을 열어 글을 가르치고 야학 교재로 『농민독본』을 펴냈다. 농촌진흥단체인 ‘월진회’도 조직하였다.
23세 되던 1930년에 ‘장부가 집을 나가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글을 남기고 만주로 망명했다. 1931년에 상해 임시정부의 김구선생에게 가서 독립운동에 몸 바칠 각오임을 밝혔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은 홍구공원에서 도시락으로 위장한 폭탄을 던져 상해 파견군 사령관 시라가와를 폭사시켰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붙잡힌 그는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2월 19일 25세의 나이로 총살형을 당하였다.
정부에서는 197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고, 사적지를 사적 제229호로 지정하였다. 윤봉길 의사의 유품 13종 68점이 보물 제568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적지 건너 충의당에는 해방 후에 돌아온 윤봉길 의사의 유해가 있다.
예덕상무사와 보부상
덕산면사무소 뒤뜰에는 우리나라 마지막 보부상단체였던 예덕 상무사의 위패를 모신 사우와 보부상의 유품을 보관한 기념관이 있다. 보부상은 봇짐을 싸서 이고 다니는 봇짐장수 ‘보상’과 지게에 등짐을 지고 다니는 등짐장수 ‘부상’이 합쳐진 말이다. 보부상은 짐을 지고 장마다 돌아다니며 물건을 사고팔아 교역을 하면서 물산의 유통을 주도했다.
보부상의 내력은 정확하지 않지만 백제 가요 「정읍사」에 남편이 물건을 팔러 다니는 사람이라는 내용이 있어서 삼국시대 때에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초 보부상 조직이 전국적으로 형성되었다. 이성계가 함경도에서 여진족과 싸움에서 크게 다쳤을 때 등짐장수가 지게에 져서 이성계를 구해주었다. 이성계는 그 공으로 보부상에게 상행위의 전매권을 주고 관이 보호하도록 했다. 그를 도운 백달원에게는 전국 보부상을 관할하는 직책을 주었다.
이후 보부상은 전국의 상권을 장악하며 관의 비호를 받는 대신 관에 절대 적으로 충성을 하였다. 보부상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는 군량운반 등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나 동학농민전쟁 때는 관군을 도와 농민군 토벌에 나서기도 했다.
한말에 상무사에 소속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말살정책과 근대적 교통기관의 발달에 따라 조직이 거의 와해되었다. 해방 이후까지 명맥을 유지한 곳이 이곳 예덕상무사이다. 보부상의 유품은 근대 상업경제 형성기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자료로 중요민속자료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추사 김정희 고택(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마을에 있는 추사 고택은 양지 바른 자리에 앉아 있다. 추사고택 앞으로는 예당평야가 넓게 펼쳐져있고 평야 너머로 삽교천과 무한천이 만나 아산만으로 빠져나가는 물길이 흐른다.
추사 탄생에는 여러 가지 일화가 전한다. 추사가 태어나기 전 집 뒤뜰의 우물이 마르고 뒷산인 팔봉산의 나무들이 모두 시들어버렸는데 추사가 태어나자마자 우물이 다시 차오르고 나무와 풀들이 생기를 되찾았다고 한다. 또 추사는 어머니 뱃속에서 스무 넉 달 만에 나왔다고 한다. 과장된 것이겠지만 모두 추사의 위대성을 강조한 일화이다.
추사고택은 화려하지 않지만 격식을 갖춘 양반가 주택의 모습을 보여준다. 대문채와 사랑채, 안채, 사랑채가 남아 있다. 대문채와 사랑채는 1977년에 다시 세웠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오른쪽에 있고 그 너머로 안채가 조금 보인다. 집이 전체적으로 동향인데 사랑채는 남향이다. 사랑채 앞에 추사가 ‘石年’이라고 글씨를 새겨 세운 빗돌은 그림자 길이로 시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한 일종의 해시계이다.
사랑채는 높은 주춧돌 위에 누마루와 같이 돌출하여 매우 권위적인 느낌을 준다. 꺾이는 부분에 대청을 두고 동쪽으로 큰 방을 , 서쪽으로 건넌방을 두었다.
안채는 口자형이다. 내외벽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넓은 대청이 있고 오른쪽에 안방과 부엌, 왼쪽으로 안사랑과 작은 부엌이 마주하고 있다. 대청이 매우 넓어 6칸인데 이것이 바로 ‘육간대청’이다. 대청 뒤쪽으로 문짝과 창이 달려 있는데 중앙칸 분합문을 열면 사당으로 통하는 계단이 이어진다.
안사랑은 젊은 도령이나 신방을 차린 서방님이 기거하는 방이다. 바깥마당쪽에 툇마루를 달아 안방 쪽에 인기척을 내지 않고 드나들기 편하게 했다. 작은 부엌에 쪽문이 있어 바깥마당으로 통한다.
이 집을 지을 때 서울에서 경공장을 불러 지었고, 비용은 충청도 53개 고을에서 한 칸씩을 부조하여 53칸짜리 저택을 지었다고 한다. 기둥마다 붙은 주련은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집을 보수하면서 추사의 글씨를 붙여놓은 것이다.
추사 김정희(1786-1856)
추사 김정희는 정조10년(1786)에 태어났다. 자는 원춘이며 호는 추사, 완당, 노과, 보담재 등 여럿 있다. 아버지 김노경과 어머니 유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뒤에 큰아버지 김노영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의 사위(화순옹주의 남편)가 되어 경주 김씨는 훈척가문이 되었다.
추사는 어려서부터 영민하였으며 당대 실학의 거두였던 초정 박제가(1750-1805)에게 학문을 배웠다. 25세 때 동지부사로 청나라 연경으로 가던 아버지를 따라 동행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당대 석학인 옹방강, 완원을 만나 한나라와 송나라 때 비첩을 기준으로 한 고증학의 세계와 실사구시론을 배웠다. 당시 78세였던 청나라 제일의 석학 옹방강은 김정희를 보고 ‘경술문장이 해동제일’이라고 격찬하였다.
김정희는 청나라에서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겨 자신의 호를 옹방강의 호 담계와 보소재를 따 ‘보담재’라 하였고, 완원의 ‘완’자를 따서 ‘완당’이라고도 지었다. 중국에서 돌아온 181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며 옹방강에게 옛 비문의 탁본을 보내기 위해 많은 비문을 조사하던 중 진흥왕의 북한산순수비를 발견하는 등 금석학에 일가를 이루었다.
학문과 벼슬에서 탄탄대로를 걷던 추사는 윤상도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9년 동안 제주도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기간 동안 추사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완성하였다.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던 추사는 제주도 귀양 중에 해남 대둔사(대흥사)의 초의선사로부터 차를 받는 등 두터운 교분을 나눴다. 유명한 세한도도 제주도 유배시절에 그렸다. 추사는 1851년에 또다시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북청에 2년 동안 유배되었다. 이후 더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과천에 기거하다가 71세 되던 해에 돌아갔다.
남연군 묘
남연군 묘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 묘이다. 흥선군이 남연군의 묘를 가야산 그 자리에 쓰게 된 것은 정만인이라는 지관의 말 때문이었다. 정만인은 충청도 덕산 땅에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리는 자리’가 있고,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자리’가 있으니 둘 중 하나를 선택하여 선친의 묘를 쓰라고 하였다. 흥선군은 물론 후자를 선택했다.
가야산 골짜기 입구인 수구를 지나 산골짜기쪽으로 올라가면 꼬불꼬불 흘러내리는 계곡을 따라 청룡과 백호의 머리가 마치 서로 팔짱을 끼듯이 상접하고 있다. 이런 산세 안쪽에는 반드시 대명당이 응결된다.
그런데 황제가 나올 자리는 가야사의 보웅전 앞에 있는 금탑자리였다. 흥선군은 이 절을 폐사시키기 위해 묘책을 써서 가야사에 불을 질렀다. 그래서 가야사는 불타버리고 금탑만 남아있는 폐사지가 되었다.
흥선군은 가야사에 불을 지르기 위해 수덕사에 큰 재를 유치하고 가야사 스님들을 모두 수덕사로 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빈 절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이 모습을 절의 나무꾼이 보고 말았다. 흥선군은 나무꾼을 죽이고 연못에 던져 버렸다. 가야사의 스님들은 실화로 절에 불이 난 것으로 생각했으나 3일 후 연못에서 칼에 찔려 죽은 나무꾼이 떠올랐다.
이에 흥선군은 또다시 기상천외한 계책을 세웠다. 이것이 유명한 옥벼루 사기사건이다. 흥선군은 평소 친분이 있던 김병학을 찾아갔다. 김병학은 안동 김씨의 종가댁 종손으로 당시 대제학자리에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안동 김씨들이 흥선군을 천시하고 모욕했지만 김병학만큼은 흥선군을 따뜻하게 돌보아 주었다.
김병학을 찾아간 흥선군은 김병학의 집에 있는 옥벼루를 구경하자고 하였다. 형산의 옥벼루로 불렸던 이 벼루는 중국의 황제가 조선의 왕에게 선물한 희대의 보물로 조선에 단 하나 있었다. 그런 벼루가 안동 김문에 와 있다는 것 자체가 안동 김문의 권세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흥선군은 김병학에게 옥벼루에 난을 치고 싶다며 이 벼루를 빌려 달라고 했다. 김병학은 난감했지만 안동 김문의 총수이자 삼촌인 하옥 김좌근은 모르게 하라고 신신당부하면서 빌려주었다.
옥벼루를 빌린 흥선군은 바로 하옥대감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선물이라며 옥벼루를 내놓았다. 김좌근은 깜짝 놀라며 종가집 벼루를 왜 가지고 있냐고 물었다. 흥선군은 태연하게 벼루에도 암수가 있다며 대감의 큰댁에 있는 벼루는 암놈이고, 이것은 수놈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벼루가 탐이 난 하옥은 이 벼루를 선물로 받은 대신 흥선군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흥선군은 아버지 묘를 이장하려고 예산에 자리를 봐 두었는데 중들이 몰려와 묘를 못 쓰게 한다고 말하였다. 그 말을 들은 하옥은 충청감사 조운철에게 흥선군이 묘를 쓰는데 장애가 없도록 하라는 쪽지를 써주었다. 이 쪽지를 본 충청감사는 당장 군사를 동원하여 가야사 방화사건을 항의하기 위해 모인 스님들을 모두 잡아 가두었다.
이렇게 해서 흥선군은 안동 김문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의 묘를 이장했다. 후일 김좌근은 흥선군의 옥벼루 사기사건을 알게 되었지만 속은 것이 창피해서 소문을 내거나 추궁할 수 없었다. 이처럼 흥선군이 아버지 묘를 옮기는 데에는 지략과 배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하여 충청도 가야산 아래 2대 천자지지의 명당에 흥선군 이하응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의 묘가 들어섰다. 이 묘역작업을 할 때 이곳이 온통 암석이어서 힘이 들었다. 산역을 직접 지휘하던 정만인은 회를 이백 수십 포씩 썼다. 흥선군이 의아하여 묻자 정만인은 천자지지라 후일 필시 파일 염려가 있다고 말하였다.
이장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흥선군은 꿈을 꾸었다. 큰 황룡이 호수에서 몸을 뒤집으며 울더니 자기 부부에게 다가오는 꿈을 꾼 것이다. 그 후 부인 민씨에게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으니 이 아이가 바로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이며 훗날 고종황제이다.
남연군 묘자리는 명당의 조건에 해당하는 요소들이 거의 모범답안처럼 펼쳐져 조산, 주산, 안산, 좌청룡, 우백호가 완연히 드러난다. 좌청룡쪽 산세가 너무 험악하여 계곡 아래쪽에 석조 보살상을 세워 그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오직 흠이 있다면 주산에서 명당으로 흐르는 지맥이 생각보다 짧아서 정만인은 만대가 아닌 2대의 천자가 나온다고 예언했던 것이다. 남연군 묘를 쓴 후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었고 아들은 고종황제, 손자는 순종황제가 되었으니 예언은 들어맞은 셈이다.
흥선군은 집권 후, 가야사를 불태울 때 새로운 법당을 지어드린다고 부처님께 약속한 서약을 실천하였다. 그래서 가야사의 주지를 금강산 비로봉의 수미암에서 찾아내 가야산 골짜기 안쪽에 새로 사찰을 지어 바쳤다.(1871년/고종 8년) 이 절이 바로 은덕을 갚는다는 의미의 보덕사이다.
충청도 내포 땅에 있는 또 하나의 명당은 자미원이다. 예로부터 중국에 내려오는 책에 따르면 동방의 백제 땅에 자미원국이 있는데 이 대명당은 천하에 둘도 없는 대지라고 하였다. 자미원은 지구의 신비를 담고 있는 곳으로 세계의 인구가 72억이 되었을 때 이 혈의 발복으로 통일된 세계를 다스릴 제왕이 등극한다고 전해진다. 자미원이 있는 곳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서산 일대 일월산, 용봉산, 봉명산, 오서산, 덕숭산, 성황산, 성주산, 백화산 근방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흥선대원군이 정만인을 불러 자미원에 대해 물었다. 정만인은 그곳은 백년 후에는 가능하지만 지금 쓰면 벼락을 맞아 죽는다고 말하였다. 그래도 대원군은 당장 가자고 하였다. 자미원에 가면 벼락을 맞아 죽고, 가지 않으면 대원군의 손에 참수 당할 것이니 정만인으로서는 무척 난감하였다. 그래서 시간을 벌어 도망칠 속셈으로 자미원에 가려면 해인사에 있는 해인을 가져가면 벼락을 피할 수 있다고 하였다. 대원군은 무장 호위병을 딸려 정만인을 내려 보냈다. 해인사로 간 정만인은 군사들에게 독주를 먹이고 이들이 곯아떨어진 틈을 타서 도망치고 말았다.
남연군 묘는 정만인이 예언한대로 도굴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이 바로 ‘오페르트의 도굴사건’이다. 독일의 오페르트는 조선과 통상교섭에서 두 번씩이나 실패하자 천주교도의 의견에 따라 남연군 묘를 도굴해서 대원군과 통상 문제를 흥정하기로 하였다. 오페르트는 총 140명으로 도굴단을 구성해서 1868년(고종 5년) 5월 10일 덕산의 구만포에 상륙하여 러시아인으로 사칭하여 남연군 묘로 갔다. 밤중에 도굴을 착수했으나 보통 묘광보다 많은 회를 쓴 까닭에 너무나 단단해서 도굴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조그만 구멍 하나만 뚫고 말았다. 그리고 이 묘의 정기를 훼손시키려고 구멍에 횃불을 질렀다. 하지만 구멍에 불을 갖다 대면 즉시 꺼지고 말았다. 명혈의 훈기가 그 불을 꺼버린 것이다. 그래서 인분을 들이부었다.
이 소식을 들은 대원군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더욱 철저히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천주교도들을 박해하였다. 그러나 오페르트 일당에 의해 남연군 묘의 정기가 훼손되고 난 후부터 대원군의 일은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마침내 1873년 11월 창덕궁의 전용문이 왕명에 의해 폐쇄됨으로써 대원군의 권세는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이런 풍수설이나 일화가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절집의 자리는 한결같이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트이면 시원스런 눈 맛이 좋고, 막히면 아늑한 운치가 좋다. 절집에서도 가장 좋은 곳은 부처님이 앉아서 내다보는 경관이다. 그러므로 어느 절을 가든 대웅전 기둥을 등에 대고, 또는 댓돌에 앉아서 앞에 있는 탑과 함께 주변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 남연군 묘 자리가 바로 그런 가야사 보웅전 금탑자리였으니 명당중의 명당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