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제19차 역사문화탐방 안내
작성자 : 수원문화원
날짜 : 06/12/31 20:11 조회 : 4016
?본원에서는 살아있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조상들의 발자취를 찾아 매달 문화유적지를 탐방을 하고 있습니다.
?제19차 역사문화탐방은 한반도의 중앙부에 해당되고 동쪽은 강원도 원주시와 충청북도 충주시, 남서쪽은 이천시, 서쪽은 광주시, 북쪽은 양평군과 접한 경기도 여주군을 찾아가고자 합니다.
?이번 제19차 역사문화탐방에 관심 있는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 일 시 : 2007년 1월 18일(목) 오전 8시 정각 출발
○ 장 소 : 경기도 여주군(영릉, 신륵사, 고달사지)
○ 출발장소 : 수원문화원(수원시민회관 주차장)
○ 회 비 : 회원 20,000원 / 비회원 30,000원 선납(※중식 포함)
○ 인 원 : 45명 (선착순 마감)
○ 준 비 물 : 카메라, 필기도구
○ 접수 및 문의 : 수원문화원 사무국 ☎ 244-2161∼3
???★★ 역사문화탐방 회비 납부는 계좌이체가 가능합니다.★★
????( 기업은행 111-114091-01-021 / 예금주 : 수원문화원 )
?※ 문화탐방 코스는 현지 사정에 의하여 변경될 수 있습니다. ※
?????????????여주 문화유적답사
????????????????????박천우(장안대학 한국사교수)
- 영릉(英陵)
영릉(英陵)은 세종대왕과 왕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원래 세종대왕릉은 아버지 태종의 능침인 헌릉이 있는 경기도 광주 대모산에 있었는데, 예종 대에 이르러 지금의 여주 능서면 왕대리로 천장하였다.
영릉은 천하의 명당이다. 대명당일수록 형국 또한 여러 개가 되는 것이 상례이듯이 이곳 자리는 여러 형국으로 불리고 있다. 앞쪽의 북성산 지맥이 이곳으로 뻗어 나와 영릉이 정남향으로 이를 쳐다보고 있어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이라고 하고, 주위의 산자락들이 봉황의 날개처럼 펼치고서 영릉을 품어준다고 해서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이라고 부른다.
영릉의 지세는 법도에 어긋나지 않고 해와 달의 모습을 띠면서 봉황이 날개를 펴고 내려오는 형국이고 정남향이어서 ‘가히 만세에 나라를 이어갈 만한 기가 탄생할 자리’로 이를 모란반개형(牧丹半開形)이라 한다. 어떤 이는 ‘세종대왕릉은 조선 왕릉 중에서 상감청자’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대명당이다.
영릉의 정문으로 들어서면 재실과 세종대왕 동상이 있고 기념관인 세종전이 있다. 훈민문을 지나 너른 능역을 조금 걸으면 묘내수가 흘러드는 듯한 커다란 연못이 있고 홍살문과 정자각이 있다. 정자각엔 오른쪽과 왼쪽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오른쪽으로 오르는 계단은 둘, 왼쪽 계단은 하나이다. 오른쪽 계단 중의 하나는 용머리와 봉황의 날개 같은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봉분은 석호 4기와 석양 4기가 밖을 향하며 호위하고 있다. 석호는 능을 지키는 수호신이며, 석양은 사악한 것을 피한다는 의미와 함께 명복을 비는 뜻을 담고 있다. 봉분 둘레는 돌난간을 두르고 동자기둥에 십이지를 문자로 새겨 넣었다. 그 앞에 팔각으로 다듬어진 장명등과 능 앞으로 석상, 석마, 문인석, 무인석을 배치했다.
봉분 바로 앞쪽에는 혼유석(일반인의 묘에서는 상석이라고 한다)이 있는데 영릉 앞에는 4개의 돌로 받친 혼유석 2개를 놓아 합장릉임을 표시했다. 혼유석은 일반묘의 상석과 같으나 쓰임새가 다르다. 일반 묘의 상석은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지만 능의 제사는 정자각 안에서 지낸다. 이때 혼백이 봉분 앞의 혼유석에 앉아 자신의 제사 광경을 지켜본다.
혼유석 아래에는 귀면 모양을 새긴 고석이 혼유석을 받치고 있다. 혼유석 좌우에는 망주석 1쌍이 있다. 망주석은 먼 곳에서 능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는 표지로서 영혼이 자기의 유택(능)을 찾아오게 하는 안내 역할을 한다. 망주석에는 상상의 동물인 세호가 새겨져 있다. 세호는 밤에 눈이 잘 보이기 때문에 뱀이나 새 등으로부터 봉분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 영릉(寧陵)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효종(1619~1659)과 인선왕후 장씨가 모셔진 쌍릉으로 세종대왕릉에서 약 500m 떨어져 있다. 이곳 역시 능역과 푸른 소나무들이 주변에 울창하여 그윽함을 풍긴다. 능을 감싸며 흘러 내려온 묘내수는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를 빠져 나와 참도를 가로질러 흐르고, 참도 가운데에 금천교가 놓인 것이 주변의 경관과 잘 어울린다.
정자각 뒤 봉분은 오른 쪽이 왕비릉이고 왼쪽이 효종릉이다. 왕비릉엔 곡장이 없고 왕릉에는 있다. 이 능부터 왕릉에 십이지신의 병풍석을 쓰지 않았다. 십이지신의 병풍석은 세조 이래 폐지되었다가 다시 부활되어 쓰이다가 효종릉부터 쓰지 않게 되었다.
영릉은 쌍릉이면서 앞뒤로 엇비슷하게 위치를 잡고 있어 지형과 상관없이 애당초 나란히 놓이지 않았다. 본래 동구릉 자리에 있던 영릉을 현종 14년(1673)에 이곳으로 이장했다. 이듬해 왕비도 이장하여 쌍릉으로 안치했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7세 때 봉림대군에 봉해졌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청에 굴복한 후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1649년 8년 만에 돌아와 즉위하였다. 효종은 대동법을 실시하여 민중들의 조세 부담을 덜어주고 화폐개혁을 단행하는 등 백성들의 삶을 돌보았다. 역법을 개정하고 『인조실록』, 『국조보감』, 『농가집성』 등을 간행하여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 농업생산성 향상에 기여했다. 효종은 병자호란의 한을 씻고자 북벌정책을 수립하고 군비개편과 군사훈련을 강화했다. 그러나 재위 10년 만에 41세로 승하함으로써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 신륵사(神勒寺)
여주 봉미산(鳳尾山)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신륵사는 뒤로는 숲이 우거지고 왼쪽으로는 안벽(岸壁)이, 앞으로는 여강(驪江)이라 부르는 남한강이 흐르는 절경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초 문인인 김수온은 ‘여주는 국토의 상류에 위치하여 산이 맑고 물이 아름다워 낙토(樂土)라 불리웠는데 신륵사가 이 형승의 복판에 있다’고 신륵사의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지만 정확치는 않고 고려 우왕 2년(1376)에 나옹선사가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되었다. 고려 때 신륵사에 2층으로 된 대장각을 건립하고 대장경의 일부를 봉안하였다. 조선시대 들어서 신륵사는 세종대왕 영릉의 원찰이 되면서 크게 중창하였다.
신륵사에는 절 이름과 관련한 두 가지 설화가 전해진다.
첫째는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서 자주 용마가 나타나는데 매우 거칠고 사나워 누구도 다룰 수 없었다. 그때 신륵사 인당대사가 나서 신력으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다고 한다. 또 하나의 전설은 신기한 미륵 혹은 나옹선사가 이들 사나운 말에게 굴레를 씌워 용마를 막았다고 한다. 늑(勒)자는 말(馬)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신륵사가 말과 관련이 있는 것만은 사실인 듯 하다.
- 구룡루
강변의 너른 마당을 지나면 왼쪽에 구룡루가 있다. 구룡루는 나옹선사가 아홉 마리의 용에게 항복을 받고 그들을 제도하기 위해 지었다는 전설의 누각이다. 또 석가모니 탄생 시 불을 뿌려 부처님을 목욕시켰다는 아홉 마리 용에 대한 경전의 내용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설도 있다.
구룡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구룡루는 누대 밑의 높이가 상대적으로 낮다. 이는 남한강의 수려한 경관을 볼 수 있도록 통로의 기능보다 정자로서의 역할이 컸다고 볼 수 있다.
- 극락보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아미타불 도량인 극락보전은 고려 우왕 때 나옹선사 입적 후 중창되었고 조선시대 세종과 성종 때 크게 중수되었다. 지금의 극락보전은 정조 21년(1797)부터 3년에 걸쳐 완공된 건물이다.
극락보전의 불단에는 아미타불을 주부처님으로 양옆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배치되어 있는 목조 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하였다. 이 삼존불은 광해군 2년에 봉안하였다.
극락보전은 장대석의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세워졌다. 기단 위로는 추녀를 받치고 있는 4개의 활주가 있고, 다포계 양식의 겹처마에 날렵하게 들어올린 팔작지붕이 경쾌하다. 화려한 닫집에 천장은 우물반자로 모양을 내었다. 내부에 모셔진 탱화는 후불·신중·감로탱화가 1900년, 지장탱화가 1908년에 조성되었다.
극락보전 정문 바로 안쪽 상부에 천추만세(千秋萬歲)라고 씌여 있는 현판이 있다. 나옹화상의 글씨라고 전해오는데 보는 위치에 따라 글씨가 달라 보이는 특이한 현판이다.
- 다층석탑 (보물 제225호)
극락보전 앞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다층석탑이 있다. 다층석탑의 외형은 신라나 고려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세부조형은 조선 초기 석조공예의 특이한 조형기법이 나타나 있다.
지대석 위로는 상․하의 갑석에 단엽의 복련을 둘렀으며, 매우 얕은 하층의 기단면석은 네 모서리에 형식적인 우주를 모각하였고, 네면에는 물결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그 위로 중후한 느낌을 줄만큼 두꺼운 하갑석이 놓여 있고 상층 기단면석에는 신라나 고려에서는 볼 수 없는 비룡문과 연화문·물결무늬·구름무늬 등의 조각이 섬세하고 화려하게 장식되어 둔중함을 덜어준다. 석탑에 비룡을 조각하는 경우는 드문 예로 섬세한 기교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워낙 자연환경에 약한 대리석으로 제작되어 많은 부분이 유실된 점이 아쉽다. 상륜부도 원형을 알 수 없으며 현재보다 몇 층이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조사당(보물 제180호)
조사당은 금당 왼편 뒤쪽에 있다. 신륵사에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고려말 불교계의 3화상으로 불리는 지공, 나옹, 무학대사의 덕을 기리고 그들의 법력을 숭모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중앙에 나옹, 좌우에 지공과 무학대사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지공은 나옹의 스승이고 나옹은 무학의 스승이다.
지공은 인도의 승려로 나옹이 중국 유학 중에 스승으로 모신 분으로 고려에 와서 그 명성을 날렸다. 나옹은 중국에서 10년간 유랑하면서 구도하였고 그의 종교적 덕행이 중국에 널리 퍼져 원나라 황제의 명에 의해 연경의 광제선사 주지로 부임하기도 하였다. 후에 귀국하여 공민왕의 왕사가 되었다. 무학은 나옹의 법통을 이어 받은 후법제자이며 조선 태조의 왕사였다.
조사란 일종 일파를 개창한 선덕으로 후세 사람들의 귀의와 존경을 받는 스님을 말한다. 조사당에는 흔히 그 절을 개창한 스님과 그 절에서 수행한 덕이 높은 고승들의 영정을 모셔두고 봄·가을로 기제를 지내는 것이 관례이다. 조사당 바로 앞에는 무학대사가 스승 나옹화상을 추모하여 심었다는 수령 600년이 넘은 향나무가 있다.
조사당은 대들보가 없는 팔작지붕으로 정면1칸, 측면2칸이다. 장대석으로 한 벌 쌓은 낮은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가운데 기둥을 세우지 않아 대들보가 없는 것이 특색이다. 정면 앞쪽에는 띠살무늬의 분합문 6짝을 달았으나 벽체로 고정시켰고, 측면 한 짝에는 정자문살을 달아 출입문을 삼고 있으며 3면에는 모두 벽을 둘렀다. 다포계 형식이며 내부는 우물반자의 통간으로 되어 있다.
- 보제존자 석종부도(보물 제228호)
조사당 뒤편에 보제존자(普濟尊者) 나옹화상(懶翁和尙)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가 있다. 나옹화상(1320~1376)은 고려말의 뛰어난 고승으로 이름은 혜근(慧勤)이다. 나옹선사는 고려말 불교를 새롭게 고양시킨 고승이다. 회암사에서 대중교화에 힘쓰던 나옹선사는 57세 때 임금에 의해 떠날 것을 명 받았다. 나옹선사는 밀양 형원사로 가는 도중 신륵사에 당도해 열반을 맞았다.
소나무 숲 속에 안치된 부도는 석등이 바로 앞에, 석종비가 뒤에 있다. 서북쪽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이 언덕 일대는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만들었는데 부도의 높이는 1.6m, 지름 1.1m이다. 이 부도는 통도사 금강계단처럼 높은 기단이 마련된 점이 특색이다. 방형의 넓은 기단 위에 넓고 얇은 돌을 깔고 그 중앙부에 2단의 받침대를 놓은 뒤 부도를 안치하였다.
석종형의 부도는 장중하고 위로 올라가면서 완만한 타원형을 이룬다. 어깨 부분에서 잘라진 포탄형을 조각하였는데 이는 보주를 묘사한 것이다. 보주가 안치된 정상부는 4면으로 나뉘어 불꽃모양을 모각하였다. 이 부도는 신라시대 팔각원당형의 범주에서 벗어나 새롭게 변모한 고려의 양식이다.
- 보제존자 석종비(보물 제229호)
보제존자 석종비는 석종부도 바로 뒤에 있다. 비문은 이색이 짓고 글씨는 서예가 한수가 썼다. 비문의 앞면에는 보제존자가 살다간 내력과 사상, 부도를 조성하게 된 내용을 기록하였으며, 뒷면에는 부도조성 불사에 동참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고려 후반기 전형적인 비석의 형태를 보여주며 총높이가 212cm이고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보통 비석이 용과 거북 등을 조각하는 것에 비해 지붕과 기와모양을 조각한 것이 특이하다. 꾸밈새는 단조로우나 힘차고 공을 들인 흔적이 엿보인다.
- 보제존자석종부도 앞 석등(보물 제231호)
보제존자 부도 앞에는 아름다운 석등 한 기가 있다. 이 석등은 석종부도를 장엄하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그 형태가 매우 특이하다. 재료가 화강석인데 유독 화사석(석등의 중대석 위에 있는 점등하는 부분)만은 납석(기름과 같은 광택이 있고 만지면 양초같이 매끈매끈한 암석)을 사용해 운치를 더한다. 화사석에 비천하는 용을 새겨 화려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다만 손상이 심하여 매우 애석하다. 석종부도가 매우 장중하고 남성적인데 비해 석등은 매우 섬세하고 전면의 아름다운 조각이 여성적이다. 이 석등은 고려말기의 석등의 대표적인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조선시대 왕릉 앞에 놓이는 장명등의 선구적인 일례로 평가받고 있다.
-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다층전탑은 강가에 솟은 넓은 바위 면 위에 세워져 있다. 탑 전체를 벽돌로 쌓아서 만들었기 때문에 예로부터 신륵사를 벽절이라고 불렀다. 보통 탑은 금당의 본존불 가까이 안치하는 것이 상례인데 이 전탑은 멀리 외곽으로 뚝 떨어져 있다. 그 이유는 원래 강 상류에 댐이 건설되기 전까지 이 절벽 아래는 강물이 매우 거세었다. 그래서 이 전탑을 강 절벽에 건설하여 강을 오가는 사람들의 안전을 기원해주고 홍수범람을 막아달라는 염원의 뜻이 깃들어 있다.
기단은 화강석을 이용했고, 탑신부는 모두 벽돌로 밀착하여 쌓았다. 이중 기단 위에 다시 3단의 석단을 얹고 그 위에 탑신을 안치했다. 층급받침은 층단이 좁고 불균형해 기이하게 보인다.
이 전탑의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탑의 형태가 중국탑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아 나옹화상이 중국을 여행하며 보았던 탑을 재현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탑 북쪽 수리비에 조선 영조 2년(1726)이라는 기록이 있어 이때 이 탑을 수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전탑은 공력이 훨씬 많이 들어 흔하게 만들지는 못했고, 현재 신륵사 전탑과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 등이 현존하고 있다.
- 삼층석탑
다층전탑이 위치하는 곳 조금 아래쪽 강변의 바위 위에 아담한 탑이 있다. 이 탑이 있는 곳이 나옹화상을 화장한 다비처라고 전해진다. 따라서 이 탑은 나옹화상의 자취를 기념하고 그 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기념탑이다.
- 강월헌
삼층석탑 옆에 세워진 정자이다. 본래 강월헌은 회암사에 있던 나옹화상의 처소의 이름이었는데 나옹의 문도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누각을 세웠다. 본래는 삼층석탑에 바로 붙어 있었으나 1972년 대홍수 때 떠내려가 지금의 자리에 1974년에 다시 세웠다.
- 대장각기비(보물제230호)
신륵사 대장각의 건립내력을 새긴 비로 극락보전 서쪽 언덕의 비각에 전한다.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부모의 명목을 빌고자 나옹선사의 제자들과 함께 발원하여 대장경을 인쇄하고 이를 보관하기 위한 2층의 대장각을 지었다.
비신은 좌단이 깨어져 몹시 손상되어 비를 세운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체로 우왕 9년(1383)으로 추정되어 나옹의 석종비보다 4년 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비문은 해서로 이숭인이 짓고 글씨는 권주가 썼다. 뒷면에는 대장경 인쇄와 대장각 건립에 참여한 승려와 신도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귀부와 이수의 형태는 볼 수 없고 복련대석과 옥개석으로 대치되고 있다.
- 고달사(高達寺)터
고달사터는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혜목산에 있다. 조계종 용주사의 말사이다. 뒷산은 우두산(고달산)인데 예전에는 혜목산이라고 불렀다. 시원하게 트인 앞면을 제외하고 삼면이 야트막한 산봉우리들로 쌓여 수행터로는 더 없이 좋은 곳이다. 그래서 절의 이름도 도(道)의 경지를 통달한다는 고달사이다. 이 절의 전성기였던 고려시대엔 사방 30리가 모두 절 땅이었고 수백 명의 스님들이 도량에 넘쳤다. 고달사 입구에 둥그렇게 자리잡은 작은 동산은 '짚신의 흙을 털어 생겼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어 당시 고달사를 찾은 내방객이 엄청나게 많았음을 짐작케 해준다.
이곳에는 고려시대 선문의 정신과 면모를 말해주는 뛰어난 문화재가 많다. 이 유물들은 모두 넘치는 힘과 호방한 기상이 분출하면서도 화려하고 장엄하다. 신라시대 미술이 건축물과 불상에 남아 있다면 고려시대 미술은 특히 덕이 놓은 스님들의 부도와 부도비에 집중적으로 표출되어 있다.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당시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고려 광종 때 원종대사 찬유(868~958)가 고달사 주지로 머물 때 전국 제일의 선찰로 면모를 갖추었다고 전한다. 이때 3대 사찰 중의 하나였으며, 고려중기 대각국사 의천이 천태종을 만들 때 고달사는 5대 사찰 중의 하나였다. 번창했던 고달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아마도 고려후기 무신란 혹은 고려말 성리학자들에 의해 배척받은 이후 폐사된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경기문화재단 부설 기전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중이다.
- 석불대좌(보물 제8호)
고달사터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유물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석불대좌이다. 금당지로 추정되는 곳에 불상은 없고 대좌만 절터를 지키고 있다. 조성연대는 알 수 없다. 좌대의 높이는 1.57m이며 상·중·하 지대석을 모두 갖추고 있다. 삼중으로 겹쳐놓은 방형대좌에 각 단은 각기 다른 돌로 다듬었으며 소담한 복련과 앙련을 조각해 장엄하다. 대좌의 크기나 장중함으로 보아 그 위의 불상 역시 규모나 조각기법이 뛰어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면에는 대좌 전체를 받치고 있는 지대석이 놓여있고 그 위로 각형 받침이 안정감 있게 한 단의 턱을 이루고 있다. 각형 받침의 각 면에 안상을 조각하였고 위로 복련을 둘러 새겼으며 중대를 받치는 3단 받침이 놓여 있다. 사각의 중대는 각 면 좌우에 우주를 모각하였으며 4면에 모두 큼직한 안상을 하나씩 음각했다. 상대에는 하대와 같은 기법의 앙련을 시원하게 둘러 새겼다.
- 원종대사 부도비(혜진탑비) 귀부와 이수(보물 제6호)
원종대사부도비를 받쳤던 귀부(거북 받침)와 비신 위에 얹혔던 이수(이무기 지붕)이다. 1915년 넘어져 8조각으로 깨진 비신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고, 비신 없이 귀부와 이수만 맞물려 있다.
귀부의 머리는 우락부락하고 둥근 눈, 굵은 눈썹과 주름진 이마, 약간 벌린 입 사이로 보이는 강인한 이빨이 강한 생동감을 준다. 발과 발톱의 모습이 날카롭게 표현되어 있다. 이수는 구름과 구룡이 엉키면서 서기가 발하는 형상으로 조각되어 있다. 전면에 용머리가 각각 하나씩 구름을 뚫고 솟아 나온 모습인데 오른쪽 용머리는 파손되어 없어졌다. 가운데 전액 안에 ‘혜목산 고달선원 국사 원종대사지비’라고 쓰여 있다. 전액을 받치고 있는 것이 도깨비의 몸이어서 특이하다. 도깨비는 눈을 부라리고 이를 드러내고 발톱을 세우고 있지만 무섭다기 보다 친근한 느낌을 준다.
- 원종대사 부도(보물 제7호)
원종대사 입적 19년 만인 고려 경종 2년(977)에 화강석으로 조성한 부도로 조성연대가 확실하고 완전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나말여초에 유행했던 팔각원당형의 기본형식 위에 각 부의 수법이 섬세하고 우아하게 조화되어 있다. 특히 4매석이 맞물려 짜인 넓은 방형의 지대석 위에 4매로 짜인 사각의 하대구조가 특이하다.
이 부도는 밑이 약간 넓고 중대석 몸돌이 거대하다. 둥글면서 잘록한 허리에 새겨진 중대석의 문양이 눈길을 끈다. 정면 중앙에는 부리부리한 눈과 윤곽이 뚜렷한 귀부형의 용이 머리를 길게 빼어 서쪽으로 외돌리고 있는게 매우 동적이다. 그 좌우에는 네 마리 용이 구름사이를 웅비하고 있는데 섬세하면서 웅혼함이 넘친다. 중대석 뒤쪽에 거북이 등을 보이고 있어 보기 드문 경우이다.
상대석은 앙련받침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도의 몸돌은 팔각으로 다듬어져 있는데 정면을 중심으로 문짝과 사천왕 입상을 번갈아 새겼다. 팔각지붕돌은 하나의 돌로 조각하였다. 지붕돌 천장에는 비천상이 새겨져 이곳이 천상세계임을 의미한다. 수평을 이룬 추녀에 위로 향한 여덟 귀의 전각은 반전이 큰 편이다. 정상부에는 팔각 띠를 두르고 상륜부를 받치고 있다. 상륜에는 노반, 복발, 보개, 보주, 보륜이 모두 훼손 없이 남아 있다.
- 고달사터 부도(국보 제4호)
고달사터 부도는 원감국사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시대 팔각원당형의 부도양식을 차분하게 이어받은 고려 초의 부도로 장중하고 균형이 완벽하며 우리 나라에 남아있는 부도 중 가장 크다.(높이 3.4m)
지대석은 중심에 놓인 팔각대석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매의 판석으로 짜여 있다. 지대석 위로는 두툼한 돌로 굄대를 놓았다. 지대석 상단에는 연꽃을 복련으로 둘러 피게 해서 시원하면서도 안정감이 있다.
중대석의 둥근 몸돌에는 거북을 중심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서 노닐고 있다. 이들의 몸짓이 매우 역동적이어서 사실감을 주며 웅장하다. 큼직한 연꽃이 돌려진 받침 위에 팔각 상대석을 놓고 몸돌을 안치하였다. 팔각 몸돌에는 정면과 후면에 자물통이 달린 문짝과 창살문, 사천왕이 번갈아 조각되었다. 자물통은 그 안에 스님의 사리와 경전 등이 들어 있으니 열쇠로 잠가 보호한다는 의미이고, 사천왕은 그 법장을 지키는 신이다. 눈매가 서글서글하고 몸매의 균형이 잘 잡힌 사천왕상이 돋보인다.
두툼한 지붕돌이 자칫 투박해 보이지만 여덟 귀의 전각을 날렵하게 들어올린 큼직한 귀꽃이 이를 상쇄하고도 남는다. 지붕돌 처마 밑에 새겨진 비천상이 그지없이 예쁘다. 현재 상륜부는 남아있지 않고 지붕돌을 축소해 놓은 것 같은 보개만 남아 있다. 그 위에 찰주를 꽂기 위한 원공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륜부는 매우 화려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부도는 경문왕 8년(868)에 입적한 원감대사의 부도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최근 도굴 사건이 있어서 관람이 불가능하다.
- 고달사터 쌍사자 석등(보물 제282호)
본래 이 석등은 고달사터 부도 앞에 있었으나 1959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왔고, 고달사터 부도 앞엔 석등을 놓았던 팔각 지대석만 남아 있다. 사자 두 마리가 힘찬 모습으로 웅크리고 앉아 중대석과 상대석 그리고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매우 특이한 석등이다. 우리 나라에서 사자가 나타나는 석등은 거의 모두 입상인데 이 석등사자상은 웅크리고 앉아 생동감을 발하는게 색다르다.
- 명성황후 생가
명성황후 생가는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에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6호이며 조선 숙종 13년(1687)에 지어진 집이다. 이 집을 지은 사람은 당시 숙종의 장인이며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여양부원군 민유중 선생의 묘를 지키기 위한 묘막으로 지어졌다.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은 민유중의 5대 종손으로 이 집에 거처하면서 명성황후를 낳았다.
명성황후는 철종 2년(1851) 9월 25일 이곳에서 태어나 고종의 왕비로 책봉된 후 주변 열강들의 침략, 특히 일본의 침략에 맞서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정책으로 대항하는 정치적 탁월성을 보여주었다. 일본으로서는 이러한 명성황후가 소위 대륙진출을 막는 걸림돌이어서 명성황후를 암살하기에 이르렀다.
(흔히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라고 표현하지만 시해는 자식이나 신하가 부모나 임금을 죽이는 것을 말한다.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살해되었으므로 시해라고 하면 잘못된 표현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은 더욱 진행되었고 많은 한국인들의 가슴에는 증오심이 더욱 불타 올랐다. 김구선생은 원수를 갚기 위해 황해도에서 일본 육군장교 쓰지다를 죽였고, 1909년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살해 후 법정에서 살해 이유 14개 항 중 첫째가 명성황후를 암살한 것 때문이라고 명확하게 밝혔다.
명성황후 생가 중 당시의 건물로 남아 있던 것은 안채뿐이었는데, 1975년에 안채가 중수되고 1996년에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가 복원되었다. 안채에는 1998년 당시 탄신 147주년 기념 숭모제 때 봉안된 명성황후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명성황후 생가는 웅장하거나 화려하지 않지만 조선 중기 살림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명성황후의 공부방 옆에는 명성황후탄강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碑, 명성황후가 태어난 옛 마을)가 있다. 비문의 내용이나 필체로 보아 순종의 글씨로 추측하고 있다. 이 비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1호이다.
명성황후 비각 오른쪽에는 명성황후의 6대조인 민유중의 업적을 상세히 소개한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신도비는 귀부의 머리가 묘소쪽을 향해 우향으로 틀고 있다. 향토유적 제5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