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제14차 역사문화탐방 안내
작성자 : 수원문화원
날짜 : 06/04/24 13:56 조회 : 5241
본원에서는 살아있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조상들의 발자취를 찾아 매달 문화유적지 탐방을 하고 있습니다.
제14차 역사문화탐방은 소백산의 철쭉이 유명하고 수려한 자연경관과 부석사, 소수서원 등 문화유산들로 풍부한 경상북도 영주시로 떠나고자 합니다.
◈ 부석사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부석사는 ?
신라 문무왕 16년(서기 676년)에 의상조사가 창건한 화엄종찰 부석사는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인 무량수전을 비롯해 국보5점, 보물4점, 도 유형문화재 2점 등 많은 문화재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10대 사찰중 하나입니다. 사찰 앞으로 펼쳐진 자연경관을 품안에 끌어안은 모습은 마치 부처님의 온화한 자비심처럼 모든 이의 마음을 무아의 경지에 이르게 합니다.
부석사의 유래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 해동화엄종의 종조인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으뜸 사찰입니다. 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교학(華嚴敎學)을 펴기 위해 귀국하여 이 절을 창건 우리나라 화엄사상의 발원지가 되었 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절은 신라 화엄종의 도량道場임에도 불구하고 본전인 무량수전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불(主佛)로 모셨고, 무량 수전 앞에 안양문(安養門)을 세웠으니 『安養』은 곧 『極樂』을 일컬음이니 이 절은 바로 땅 위에 극락세계를 옮겨 놓은 격이 되는 것입니다. 부석사라 이름하게 됨은 무량수전(無量壽殿)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돌'이라 부른데서 연유하였다고 합니다. 1916년 해체 보수시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고려 초기에 무량수전 등을 중창하였으나, 공민왕 7년(1358) 적의 병화를 당하여 우왕 2년(1376) 무량수전이 재건되고, 우왕3년(1377) 조사당(祖師堂)이 재건되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경내에는 신라유물인 무량수전 앞 석등(石燈)(국보 제17호),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보물 제220호), 삼층석탑(三層石塔)(보물 제249호), 당간지주(幢竿支柱)(보물 제255호)등이 있고, 고려시대 유물인 무량수전(無量壽殿)(국보 제18호), 조사당(祖師堂)(국보 제19호),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국보 제45호), 조사당벽화(祖師堂壁畵)(국보 제46호), 고려각판(高麗刻板)(보물 제735호), 원융국사비(圓融
國師碑)(도유형문화재 제127호), 삼층석탑(三層石塔)(도유형문화재 제130호) 등이 있습니다. 특히,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 중 하나이며, 조사당벽화는 목조건물에 그려진 벽화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재 유물전시관(遺物館展示館)에 보관되어 있다
◈ 금성단
1993년 11월 30일 경상북도기념물 제93호로 지정되었다. 소수서원(紹修書院:사적 55)에서 서북쪽으로 약 200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조선 세조 때 단종(端宗)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화를 당한 금성대군(錦城大君:세종의 여섯째 아들. 단종의 숙부이자 세조의 아우)과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 및 그와 연루되어 순절한 의사(義士)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설립된 제단이다.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하자 그 일에 연루되어 순흥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어 있던 금성대군은 1456년(세조 2)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과 의기투합하여 강원도 영월 청량포에 유배된 단종을 복위하기 위하여 순흥에서 의사들을 규합하던 중 발각되었다. 관련자는 모두 학살당하고 순흥부는 폐읍되었다.
1683년(숙종 9) 순흥부가 복원되고 순절의사들이 신원(伸寃)되자 1719년(숙종 45)에 부사 이명희(李命熙)가 주창하여 그 유허지에 금성단을 설치하였다. 1742년(영조 18)에는 경상감사 심성희(沈聖希)가 주창하여 단소를 정비했다. 1980년에 단소 앞에 재청과 주사를 건립함으로써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매년 봄가을에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다.
경내에는 크게 재실(齋室)·주사(廚舍) 영역과 단소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재실은 정면 4.5칸 측면 4칸 규모의 ㄱ자형 건물이다. 건물 앞쪽에 ㄴ자로 담장을 설치하여 전체적으로 보면 네모난 안뜰이 형성된다. 서쪽담에 일각문이 있다. 관리인이 거처하는 주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ㄷ자형 건물이다.
재실과 주사는 홑처마 맞배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상부 가구는 3량으로 되어 있고 기둥은 모두 네모기둥을 사용하였다. 단소는 금성단문 안에 품(品)자형 구성으로 중앙 상단에 금성대군, 오른쪽에 이보흠, 왼쪽에 그 외 순절의사들의 위패를 모시고 순의비(殉義碑)를 세웠다. 금성대군의 단 왼쪽에는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錦城大君成仁神壇之碑)’라는 글씨가 새겨진 금성단비가 세워져 있다.
◈ 소수서원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의 유현(儒賢) 안향(安珦)의 사묘(祠廟)를 세우고 다음해에 학사(學舍)를 이건(移建)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이 서원의 시초이다. 그후 1544년 여기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1633년(인조 11)에는 주세붕을 추배(追配)하였다. 1550년(명종 5) 이황(李滉)이 풍기군수로 부임해 와서 조정에 상주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사액(賜額)과 《사서오경(四書五經)》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내사(內賜)를 받게 되어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공인된 사학(私學)이 되었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철폐를 면한 47서원 가운데 하나로 지금도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서원의 건물로는 명종의 친필로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편액(扁額)이 걸린 강당, 그 뒤에는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 동북쪽에는 학구재(學求齋), 동쪽에는 지락재(至樂齋)가 있다. 또한 서쪽에는 서고(書庫)와 고려 말에 그려진 안향의 영정(影幀:국보 111)과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보물 485)가 안치된 문성공묘(文成公廟)가 있다.
???★ 일 시 : 2006년 5월 9일(화) 오전 08:00 정각 출발
???★ 장 소 : 경북 영주시(부석사, 금성단, 소수서원)
???★ 출발장소 : 수원문화원(수원시민회관 주차장)
???★ 회 비 : 월 20,000원 선납(중식포함)
???★ 인 원 : 90명 (선착순)
???★ 준 비 물 : 카메라, 필기도구
???★ 접수 및 문의 : 수원문화원 사무국 ☎ 244-2161∼3
???※ 역사문화탐방 회비 납부는 계좌이체가 가능합니다. ※
???(기업은행 331-000534-01-206 / 예금주 : 수원문화원)
???※ 문화탐방 코스는 현지사정에 의하여 변경될 수 있습니다. ※